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기우진 Jul 04. 2024

731 부대와 이시이 시로 2

다큐: <The Truth of Unit 731: Elite medical students and human experiments, NHK (2017)>


1994년 8월 14일 경향신문에,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독자들이 두 눈으로 731부대의 만행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그 사진들 중에 하나는, 임신부에게 매독균을 주사한 후, 인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기 위해, 산모와 아기를 해부하는 사진이었다. 마취도 없는 해부실험이었다. 국내 언론들에 의하면, 731부대의 만행이 일본에서 처음 드러난 발단은, 일본 나가사키대학의 쓰네이시 케이이치 조교수(과학사전공)가 1981년 5월에 쓴 <사라진 세균전 부대>란 제목의 저서라고 한다. 그러나, 731부대의 만행은 이미 이차대전직후인 1949년에, 정식 재판에 의해 세계에 알려졌었다. 그 재판은 바로 그당시 소련이 집행한 하바롭스키 재판이다. 그 당시, 미국은 하바롭스키 재판결과를 소련공산당의 거짓 주장이라고 치부하였는데, 1981년 이후에 일본과 미국등지에서 양심적 연구가들과 기자들에 의해,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1945년 일제패망직후에 미국정부는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원들에 대해 취조를 하였고, 그 취조를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어떠한 731부대원들도 일본에서 미군정에 의해 이루어진 전범재판에 전혀 불려 나오지도, 언급되지도 않았다. 전후에, 그들은 일본 의학계에서 승승장구를 하였다. 왜 그랬을까. 먼저, 하바롭스키재판을 통해 드러난 731부대의 만행을 살펴보자.


하바롭스키는 중국과 소련의 동북지역경계에서 우수리 강과 아무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아름다운 동유럽풍 도시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곳이다. 대표적인 예로, 그 유명한 여성독립운동가로서, 1918년에 러시아백군과 일본군에 체포되어 만 33세의 나이에 처형당하였던 김알렉산드라가 이 도시를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생애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그 도시 마르크스가24번지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 도시에서,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까지 12명의 일본군 전범포로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피고인들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군으로서 만주에 상주하고 있던 일본관동군의 야마다 오토주 (체포 당시 관동군사령관, 대장), 가지쓰카 류지 (관동군 군의부장, 군의 중장), 다카하시 다카아쓰 (관동군 수의부장, 수의 중장), 사토 슌지 (관동군 제5군 군의부장, 군의 소장), 가와시마 기요시 (제4부 세균제조부 부장, 군의 소장), 가라사와 도미오 (제4부 세균제조과 과장, 군의 소좌), 니시 도시히데 (제4부 세균제조과 과장, 군의 소좌), 오노우에 마사오 (731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장, 군의 소좌), 히라자쿠라 젠사쿠 (무단장 지부장, 군의 소좌), 미토모 가즈오 (731부대 연구원, 수의 중위), 기쿠치 노리미쓰 (731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 위생병), 구루시마 유지 (731부대 린커우 지부 위생병)였다. 죄목은 세균무기를 개발하고 실제 사용한 죄였다. 이 재판 후, 1950년에 소련은 이 재판에 대한 공식문건을 영어로 번역 출간하였다. 이 책의 제목은 ‘Materials on the Trial of Former Servicemen of the Japanese Army Charged with Manufacturing and Employing Bacteriological Weapons’. 소련검찰의 공소장, 문서증거, 피고인들과 증인들에 대한 취조기록등이 포함되어있다. 


가와시마 기요시 소장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천황의 비밀칙령에 의해, 일본군은 1935년과 1936년에 이미 만주에 세균전을 준비하고 실행하기위한 두개의 극비 부대를 설치하였다. 정체를 감추고 비밀유지를 위해, 이 두 부대의 하나는 ‘관동군 검역 급수부' (나중에 731부대로 명명), 다른 한 부대는 ‘관동군 군마 방역창’ (100부대)이라고 명명하였다. 설립 당시에, 검역 급수부 부대장은 이시이 시로였고, 군마 방역창 부대장은 와카마쓰 유지로였다. 이 두 부대는 관동군 사령관의 직속부대였다. 체포당시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야마다 대장과 관동군 수의부장이었던 다카하시 중장의 증언에 의하면, 731부대와 100부대의 주 임무는 세균전을 위한 연구와 세균무기 생산이었다. 731부대와 100부대는, 중국 여러 곳에 지부들을 설치하였는데, 이 지부들의 임무는 이 두 부대가 만든 세균무기를 실제 사용을 위한 준비였다. 이 두 부대들은 전문적인 세균학자들, 연구원과 기술자들로 이루어졌다. 이 두 부대의 규모는 어마했다. 731부대에만, 3000명 정도의 인원이 있었다.


1936년 가을, 핑팡에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령이 내려지는 것을 시작으로, 1938년까지 총 여덟 마을에 살던 최소한 600여 가족들이 강제로 집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1939년, 총 면적이 6 제곱 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땅에 생화학무기생산을 위한 시설이 세워졌다. 윤중로 제방 안쪽의 여의도 면적이 2.9 제곱 킬로미터이니, 이시이의 생화학무기 공장은 그 여의도의 두배보다도 더 넓었다. 이 거대한 땅에 80여개의 빌딩들이 지어졌다. 본부건물, 실험실, 해부실, 동상실험실, 생체실험용 특별감옥, 시체를 소각할 세개의 용광로, 군인막사, 무기창고, 실험실용 동물축사, 마구간, 민간노동자숙소, 직원들 음식재배를 위한 농장, 위안부의 매춘소, 그리고 수영장등이 들어섰다. 또한, 이 생화학실험시설에서 하얼빈역까지 연결하는 특별철도가 놓여졌고, 새로운 생화학무기의 실험등을 위한 군용비행장이 만들어졌다. 이 거대한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는데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예로, 1936년 일본정부로부터 이시이에게 주어진 일년예산은 최소 천만엔이었다. 이 금액은 2015년의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엔, 그러니까 일천억원이 넘는 금액이다.  그당시 이시이는 겨우 중령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막대한 예산이 일개 부대에 주어질 수가 있었을까? 토오쿄오에 소재한 군부와 정부 상층부의 누군가가 강력 지지하고 인가를 해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예산이었다. 


이 두 부대의 세균무기의 생산량은 막대하였다. 731부대만, 3-4일만에 30,000,000billion 병원균을 생산할 수 있었다 한다. 생산량이 너무 방대하여, 이 두 부대원들은 세균량을 킬로그램 단위로 언급하였다. 가와시마 소장과 가라사와 소좌는 731부대가 매달 300킬로그램의 페스트(역병)세균을 만들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페스트이외에도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다른 세균들도 배양하였다. 이러한 세균들을 벼룩에 점염을 시켰고, 그 벼룩들을 번식시키는데 쥐를 이용하였다. 이 목적을 위해 무지막지한 숫자의 쥐들을 길렀다. 한 예로, 731부대 소속 543 지부에만, 1945년 여름 당시 13,000마리의 쥐들이 있었다. 야마다 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은 만들어진 세균무기를 비행기에서 떨어뜨리거나, 우물, 농작물과 소들을 오염시키는 방식 등으로 뿌려지도록 승인하였다.


세균무기의 효용성에 대한 시험은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생체실험을 통해 수행되었다. 야마다 대장은 자신이 이 두 부대의 생체실험을 허용하였다고 인정하였다. 이 생체실험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731부대원들은 생체실험 대상들을 ‘마루타’ (통나무의 일본말)로 명명하였다. 이 부대원들이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비인간으로 취급하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생체실험 대상은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으나, 그 중에 조선독립운동가나 소련인들도 다수 있었다. 가라사와 소좌는, 1943년과 1944년에 수 십명에게 자행된 탄저균과 가스괴져균실험에 입회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니시 소좌는 1945년 그 당시 731부대 제2부 부장이던 이카리 중령과 연구원 후타기가 열명의 중국인들에게 자행한 가스괴저균실험에 입회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열명의 중국인들이 기둥에 묶였고, 10-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가스괴저균이 들어있는 폭탄을 설치한 후에, 그 폭탄을 원거리에서 전기로 폭발시켰고, 열명 모두 세균에 감염된 파편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리곤, 일주일이내에 그들 모두는 극심한 고통 속에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비슷한 생체실험이 관동군 소속 100부대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100부대의 실험 조교였던 하타키 아키라와 후루이치에 의하면, 100부대에서도 세균실험과 동상실험이 살아있는 죄수들에게 행해졌다고 한다. 생체실험에 희생된 주검들은, 거대한 용광로에서 태워졌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은 수백명 정도의 조선인들을 포함하여, 최소한 3000명 정도라고 한다. 


이 생체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만주에 소재한 일본 헌병대와 군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달되었다. 그들에 의해 체포된 중국인, 소련인, 그리고 조선인들 중에서 그들이 중죄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731부대에 보내졌다. 일본군에 저항을 했던,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소속 군인들 (조선인들도 포함), 게릴라들, 러시아 적군(red army), 러시아에 소속된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첩보요원들, 그리고 만주에 살던 소작인, 노동자, 상인들이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공식 문건에 보내지는 곳을 직접 명명하지 않고, ‘특별위탁 (special consignment)’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얼빈에서 동북쪽으로 380km 정도 떨어진 지아무시(Jiamusi)에 위치한 만주국 헌병대 지아무시 지부장이었던, 타치바나 타케오의 증언에 의하면, 헌병대본부의 명령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을 정식법정에 보내지 않고 약식재판을 하고, ‘특별수송 (special transfer)’라는 이름 하에 바로 731부대로 생체실험을 위해 보내졌다. 가와시마 기요시 소장에 의하면, 매년 최소한 600명의 죄수들이 731부대에 보내졌다고 한다. 2005년 8월 2일 하얼빈일보는 생체실험 대상자였던 1,463명의 명단을 발굴 공개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조선인 희생자는,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들로, 심득룡, 이청천,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고창률 등이다. 가와시마에 의하면, 핑팽수용소가 운영된1940년부터 1945년까지의 5년간 동안, 핑팽수용소에서만, 최소한 3천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비슷한 생체실험이 100부대에 의해서도 이루어졌으니, 희생자의 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일본군은, 이렇게 반인도적인 생체실험을 통해 만든 세균무기들을 중국과의 전쟁 중에 실제로 썼다. 한 예로, 1940년 여름 731부대 소속 비행기가 전염병(plague)균 폭탄을 중국본토에 떨어뜨려, 전염병이 창궐하게 하였다. 세균제조과 과장이었던 가라사와 도미오 소좌에 의하면, 1940년 이시이의 명령에 의해 70킬로그램의 장티푸스세균과 50킬로그램의 콜레라세균을 만들어주었고, 1940년 9월에 이시이와 여러 장교들이 그 세균무기를 가지고 항고우(Hankow)로 떠나서, 1940년 12월에 돌아왔는데, 그때 그 장교들이 그 세균무기가 전염병 창궐을 일으키는 ‘좋은 결과’를 내었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 장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노자키 소령이 그 증거로 상하이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닝보(Ningbo)시 주위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였다는 뉴스 기사가 실린 중국 신문을 자신에게 직접 보여주었다고, 가라사와 도미오 소좌가 증언하였다. 그 신문 기사는, 일본비행기가 저공 비행을 하며 무엇인가를 떨어뜨리는 걸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그 전염병이 일본군의 만행이었다고 정확히 보도하였음을 가라사와 소좌 본인이 직접 읽었다고 증언하였다. 니시 도시히데 소좌 또한, 중국군 상대로 일본 세균부대가 저지른 만행을 보여주는 비밀 다큐멘터리 영화를731부대에서 직접 보았다고 증언하였다. 그후에도, 알려진 것 만으로도, 731부대는 1941년과 1942년에 중국 중부에 세균무기를 실제로 투하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731 부대와 이시이 시로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