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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Jul 02. 2024

이차대전, 일제의 생체실험 2

아이카와 사건, 큐슈제국대학 의과대에서 자행된 생체실험

* 표지사진: 아이카와사건을 영화화한 <The Sea and Poison (바다와 독약) (1986)> 


이차세계대전 당시, 일본내의 여러 형무소에서는, 연합군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형자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 이 생체실험에 연관이 되었던 의사들 중에 일부는, 전후에 전범 B,C급으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한 예가 시나가와형무소의 ‘미친 의사’로 불리던 토쿠다 히사키치다. 시나가와형무소에는 필리핀등지에서 체포되었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전쟁포로들을 다수 수용하고 있었다. 토쿠다는, 그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그 연합군 전쟁포로들에게 여러 물질의 혈관주입실험을 시행하였다. 마크 펠톤이 쓴 책, ‘The Devil’s Doctors: Japanese Human Experiments on Allied Prisoners of War’에 의하면, 영국인포로 윌리엄 홀란드(William Holland)를 비롯한 두명의 포로의 혈관에 두유(soybean milk)를 주입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그 실험 직후 홀란드는 ‘발을 벌떡 들었고, 개거품을 물고 울부짓으며 죽었다’. 살아남은 포로중에 미국 군의사였던 해롤드 커쉬너(Harold Keschner)는, 토쿠다가 포로들의 혈관에, 카스토르 오일(castor oil)과 황(sulphur)을 섞은 액체, 산성물질, 에테르와 혈장(blood plasma)등을 주입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쿠다는 형무소에서 우수한 일꾼으로 여겨졌으며, 방문하는 일본군대 장성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졌다고 한다. 전쟁후, 토쿠다는 1948년 요코하마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을 당한다. 


또 다른 한 예는, 윤동주의 죽음에 연관이 있는 큐슈제국대학 의과부에서 1945년 5월에 벌어졌던 생체해부사건이다. 1945년 5월 5일 미국의 괌기지에서 출발하여, 큐슈섬에 위치한 타치라이 군용비행장에 대한 폭격이 투입된 B-29 폭격기 중에서, 3대가 일제공군에 의해 격추가 되었다. 그 중에 한대는, 일본공군 카미카제의 일원이었던 19살의 카주야 킨조(Kinzou Kasuya)가 자기의 비행기를, 마빈 왓트킨스 (Marvin Watkins) 중위가 조종하던 B-29기체와 충돌하여 격추가 되었다. 왓트킨스 중위는, 충돌 후 장병들에게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11명 가량의 미군 승무원들은 안전하게 비행기에서 탈출을 하였다.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괌 기지에서 급하게 승선이 이루어진 관계로 정확한 병사 숫자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중 몇명은 지상에 착지 후, 살아남았으나, 일본군대와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후쿠오카(Fukuoka) 일본군 사령부에 소재한 임시포로수용소로 옮겨진다. 그곳에는, 격추된 다른 비행기에서 탈출한 미 공군 포로들이 이미 수용되어 있었다. 마을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 포로들에게는 더 참혹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역사학자였던 이에나가 사부로가 쓴 책, ‘The Pacific War (태평양전쟁)’과 마크 펠톤의 책, ‘The Devil’s Doctors, Japanese Human Experiments on Allied Prisoners of War’에 의하면, 그후 3주간 동안 그 포로들 중 여덟 명에게 벌어진 것은, 큐슈제국대학 의과부 교수와 의사들이 행한 생체실험이었다. 


그 당시 의과대 학생이었던, 토노 토시오 (Tono Toshio)의 증언에 따르면, 5월 17일, 두명의 포로가 눈가리개를 한 채로 의과대학의 병리실험실로 끌려왔다. 눈가리개가 풀리고, 주위를 돌아본 포로들은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당연히 그들을 둘러싼 의사들이 자신들이 체포 당시에 받았던 상처들을 치료해주려고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들이 수술대에 눕혀진 후, 마취없이 생체실험을 시작하였다. 첫 대상은 테디 폰츠카 (Teddy Ponczka)중사 였다. 의사들은 그의 피를 다 빼고, 바닷물을 혈관에 가득 주입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긴 기간을 통해 소량으로 주입되며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혈액대체용 바닷물 실험이 폰츠카 중위에게 극단적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물론, 폰츠카 중위는 심한 고통 속에 죽었다. 다른 포로들에게도 비슷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어느 포로들은, 간(liver)이 제거되거나, 간질병에 대한 영향을 보기 위해 뇌의 일부가 제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바닷물 실험도 여러번 더 이루어졌다. 물론, 결과는 매번 같았다. 모든 포로들은 죽었다. 생체해부실험후 시체들은, 해부학 학생들의 해부실험을 위해 소독방부제인 포름알데히드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시체들은 폐기가 되었고, 모든 증거들은 없앴다.  그러나, 이 만행은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볼티모어 선 지의 1995년 기사에 의하면 (A quiet honesty records a World War II atrocity, By Thomas Easton THE BALTIMORE SUN), 그 당시 그 대학에 있던 외국학생들에 의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접한, 미 군정은 연루된 군인과 큐슈대학의사들을 비롯해30명을 체포하여 조사한 후에 군정재판에 기소한다. 1948년 3월 11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연합군의 전쟁범죄재판에서 30명중에 2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에, 다섯명은 사형에, 네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선고대로 형을 살지 않고 곧 풀려났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 맥아더는 거의 모든 형을 감형을 하였고, 1958년 까지, 이 생체해부실험에 연루되었던 죄수들은 모두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격추된 B-29폭격기의 조종사이며 지휘관이었던, 와트킨스 중위는 생체해부실험을 당하지 않았다. 일본 규슈소재 군당국은 지휘관인 그가 폭격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세한 심문을 위해, 토오쿄오로 이송하였기 때문이다. 생체해부를 면한 와트킨스 중위는,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버지니아 주에 돌아와서 1980년대 후반까지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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