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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Jul 02. 2024

이차대전, 일제의 생체실험 1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

영화: <동주 (2016)> 


윤동주. 27. 송몽규. 27.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몇개월 전, 겨울의 끝 무렵에 이 두 청년은 식민지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나이는 만 27세. 젊음의 낭만과 인생에 대한 포부에 가슴이 벅찰 나이다. 1943년 7월 쿄오토오에서 일본 경찰에게 ‘재쿄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체포된지, 1년 반 가량이 지난 후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기를 염원하였던, 이 두 청년들은 왜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을까.  


송몽규. 윤동주. 이 두 분은 평생을 거의 같이 하였다. 두 분은 1917년, 만주 북간도 명동촌 (지금은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에서 사촌 형제로 태어났다. 명동촌은 그 당시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의 산실이었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기전에사격연습을 하였던 곳이 바로 이 명동촌이다. 송몽규는 일찍이 은진중학교시절에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의 조선독립단체에서 교육을 받고 제남(중국식 발음 필요)에서 독립운동에 참여를 하였다가, 1936년에 다시 귀국하였다. 송몽규가 중국에 있을때, 윤동주는 평양숭실학교로 옮겨 수학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동향친구였던 문익환 등과 동맹퇴학으로 저항을 하였다. 그후, 1938년에 연희전문대학 문과에, 둘은 같이 입학을 한다. 연희대를 졸업 후, 1942년 봄에, 두 사람은 같이 일본에 유학을 떠난다. 송몽규는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서, 윤동주는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 당시 송몽규를 중심으로 윤동주, 고희욱등 여러 조선인학생들이 모여, 조선의 무장을 돕는데, 일제의 징병제를 이용하자는 주장등을 하였다 한다. 그러한 활동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1년반 가량 후, 두 사람 모두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국땅 형무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두 분의 치열했던 삶을 여기에서 짧게나마 기술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인때문이다. 윤동주의 공식적 사인은 뇌출혈이다. 왜 윤동주는 이병에 걸렸을까?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매우 건강하였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에 축구선수로 활약을 하였고, 체포되기 몇일 전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러했던 그가, 쿄오토에서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이 된지 9개월 가량의 짧은 시간을 보낸 후,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죽었다. 27세의 건장한 젊은이가 9개월 동안의 형무소 생활 끝에 죽게 되었다는 뇌출혈은 어떤 병일까? 그리고, 뇌출혈이 단순한 영양부족으로 젊은 사람에게 쉽게 일어날 병일까? 의사 석수현에 의하면, ‘뇌출혈의 가장 흔한 원인은 조절되지 않는 고혈압이고, 다른 원인으로는 머리의 외상(head trauma), 뇌동맥류(cerebral aneurysm) 혹은 뇌동정맥기형(AV malformation) 의 파열, 뇌종양의 출혈(Tumor), 출혈 조절의 장애(bleeding disorder) 등이 있을 수 있다.’ 미국심장학회 왭사이트에 실린 한 연구에 의하면, 20-39세의 남자가 뇌출혈(Intracranial hemorrhage)과 뇌경색(Cerebral infarction)을 아우르는, 뇌졸증(stroke)으로 죽을 확률은 0.2 퍼센트에 불과하다. 즉, 1000명중에 고작 2명이 뇌출혈이나 뇌경색으로 죽는다. 뇌출혈 진단에 있어서는 Brain CT, MRI 등의 영상 검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CT, MRI 등의 진단 목적의 영상 검사도 시행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로지 임상 증상만을 바탕으로 진단을 했을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진단이 확실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높고 명확한 부검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윤동주의 사망 원인을 뇌출혈으로 특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진짜 사인의 실마리는 영화 <동주>에서의 한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죄수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시약실 앞에 줄을 서있고, 윤동주가 간수에게 끌려 그 줄 뒤편에 가서 선다. 그때 시약실에서 송몽규가 나와서 걸어 지나친다. 윤동주가 머리를 돌려 송몽규를 바라보자,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돌아보지 말라며 나지막이 덧붙인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게 바닷물주사예요.’ 이 장면은 송몽규가 살아있을 때 했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송몽규의 조카인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 의하면, 윤동주의 옥사 통지를 받고, 그의 부친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가져온 사람은 당숙 윤형춘이다. <윤동주 평전>에 실린 윤영춘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한 것은 윤동주 시인이 사망한지 10일 후였다. 윤영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죽은 동주는 후에 찾기로 하고 산 사람부터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몽규를 먼저 찾았’는데, 면회 절차를 받고 옥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서자 푸른 죄수복을 입은 20대의 한국 청년 근 50여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 윤영찬은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왜 그 모양이냐”라고 물었더니,’ 송몽규가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하고 말소리는 흐려졌다.’ 그후 송몽규도 1주일 후 쯤에 사망한다.  


그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인근에 소재한규슈 제국대학 의학부에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로, 바닷물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실험하고 있었다. 석수현의 의견을 들어보자. ‘현대 의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감염의 예방이다. 특히 혈관을 확보하거나, 몸 안쪽에 있는 구조물에 대한 치료(수술 및 시술 등)를 시행할 때 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 당시 실험 및 치료에 현대의 의료 시스템에서나 가능한 완전한 소독과, 멸균이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몸 안쪽에는 세균이 전혀 없는 공간이 많으며, 이런 공간에 균이 들어가면, 균이 급속도로 자라서 혈관을 타고 몸전체로 이동하며 패혈증(sepsis, 균이 피를 타고 돌아다니는 현상)을 발생시킨다. 더군다나 혈관 내에 무언가를 주입하는 시술이라면, 철저한 소독이 없다면 더더욱 패혈증이 빠르게 발생할 수 있다. 바닷물을 주입 받았던, 다른 정체불명의 용액을 주입 받았던 간에 발생할 수 있는현상이다. 패혈증은 적절한 항생제 치료가 없다면 치료하기 매우 어려우며, 특히 전신적으로 진행 될 시 septic shock 및 systemic inflammatory response syndrome 을 발생시키는데, 이 syndrome 에 포함되는 현상으로 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 (DIC) 이라는 현상이 있다. DIC 는 전신적으로 혈액응고의 장애를 일으키는 현상으로, 혈액 응고의 장애로 인해 몸 곳곳에서출혈이 발생하거나, 혈전이 생성되거나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중 뇌출혈도 충분히 발생 가능한 것으로 case report 또한 있다(Hyun Jin Baek, Doo Hyuk Lee, Kyu Hyung Han, Young Min Kim, Hyunbeom Kim, Byeongwook Cho, Inkuk Lee, Kanghyun Choi, Hojin Yong, Goohyeon Hong.  Fatal Intracranial Hemorrhage in a Patient with 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 associated with Sepsis.  Korean Journal of Critical Care Medicine 2016; 31(2): 134-139.). 따라서 생체 실험을 당한 것이 매우 분명한 윤동주, 송몽규에게는, 패혈증과 연관된 사망이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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