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들 (7)

by 온실라

노아와 정민은 화랑관을 벗어나 화랑관 뒤편 숙소로 향했다. 화랑관의 숙소는 화가들이 임시로 머물며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윤창섭 사장이 특별히 만든 곳으로 2층의 벽돌집 형태를 하고 있었다. 숙소의 바로 옆에는 넓은 작업실이 있어 여러 명의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업해도 전혀 무리가 없게 준비돼 있었다. 말 할 필요도 없이 이 역시 윤창섭 사장의 주문이었다.


화랑관의 숙소는 최대 6명까지 머물 수 있는 큰 집이었지만 현재 사용하는 사람은 지현 뿐이었다. 정민이 지현에게 연락했을 때, 지현은 작업실에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기꺼이 노아와 정민의 방문 요청을 수락했다. 지현은 들려도 괜찮겠냐는 정민의 요청을 거의 환대하는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화랑관에 벌어진 살인사건 때문에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훈 작가가 그렇게 갈지 누가 알았겠니.”


노아가 굳이 취재 요청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지현은 이번 사건에 대해 본인이 아는 것과 들은 것 모두를 떠들 준비가 돼있었다. 정민은 아마도 심리적 안정감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지현은 경찰 조사도 매우 짧게만 받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8시도 전에 화랑관을 떠나 숙소로 돌아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사망추정시각 중에 현장에 없었던 만큼, 경찰의 용의선상에도 빠르게 벗어난 것이다. 덕분에 경찰을 상대로도 지현은 크게 고생하진 않은 것 같았다. 정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도훈 작가가 원한을 많이 살 타입이긴 하지. 나도 솔직히 좋아하진 않았고.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이 화랑관에서 살해당할 줄은…… 애초에 도훈 작가 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을까? 주환 작가와 딱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초대까지 받았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현은 도훈이 화랑관에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정민은 그날 지현에게 도훈과 하윤을 봤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굳이 이야기할 만한 소식도 아니었고, 또 그때 지현이 꽤 많이 취해서 쉬지 않고 웃고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말할 타이밍도 없었다.


노아는 참을성 있게 지현이 하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질문하고, 때로는 공감했다. 정민도 옆에서 가만히 들었다. 이미 경찰로부터 사건 내막을 어느 정도 들은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지현이 하는 얘기 중 영양가가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직원들한테 정말 이상한 얘기를 들었거든.”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지현이 목소리까지 내리깔고 말했다.


“글쎄 화랑관 CCTV 어디에도 범인의 모습이 안 찍혔다는 거야. 정말 이상한 일 아니니? 거기에 CCTV가 없는 곳이 없는데 말이야. 게다가 도훈 작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다 동관에 몰려 있었는데, 도훈 작가만 서관에 죽어있었다고 하네. 정민이 너도 알겠지만 동관에서 서관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돼 있잖아? 범인이 유령은 아닐 텐데 무슨 수를 쓴 건지…….”


“저희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때문에 경찰도 수사하기 어려운 모양이더라구요.”


노아가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지현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작가님은 그날 화랑관을 떠나 바로 숙소로 돌아오셔서…… 주무신 건가요?”


“아뇨. 바로 자진 않았어요. 원래는 도착하자마자 씻고 잘 생각이었는데…… 화랑관에 나오자마자 지인에게서 전화가 와서.”


노아의 질문에 지현이 무심코 대답했다.


“전화를 받으면서 숙소로 돌아왔는데, 짧게 통화한다는 게 1시간이 넘게 대화를 했지 뭐예요. 전화를 끊고 나니까 취기가 좀 가신 것 같아서 작업실에 와서 간단하게 일 좀 하다가…… 피곤해서 씻고 잤죠.”


“그렇군요. 그때가 몇 시쯤이었나요?”


“잔 시간이요? 10시 좀 넘어서? 그런데 왜요?”


아하. 순간 지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몹시 즐거워보였다.


“그러고 보니 노아 기자님은 이런 범죄 사건 전문이라고 했죠? 혹시 방금 저한테 물어보신 게 그…… 알리바이 확인이라고 하나요? 그런 건가요?”


“죄송합니다. 작가님 뿐 아니라 지금 사건 현장에 계셨던 분들을 만날 때마다 일일이 확인 중입니다.”


노아가 변명했다. 하지만 지현은 기분나빠하기는 커녕 싱글벙글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근데 정민이는 노아 기자님이랑 왜 같이 다니는 거야. 혹시 두 분이 이번 사건 관련해서 같이 취재 중인가?”


“제가 노아를 도와주고 있어요. 저도 관련돼 있다 보니까, 사건에 신경이 쓰여서요.”


정민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구나. 지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이 묘했다. 지현은 진심으로 현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정민은 지현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 그녀에게 어쨌든 경찰조사를 받느라 수고했다는 둥, 많이 놀랐겠다는 둥 쓸데 없는 이야기를 했다. 지현은 계속 묘한 눈빛을 보내며 정민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다행히 노아 앞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지현과 작별을 고하고 노아와 정민은 숙소를 나왔다. 숙소의 문을 나서며 노아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숙소의 문 위쪽에도 CCTV가 설치돼 있어 숙소에 출입하는 인원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경찰은 아마 이 CCTV 기록도 확인했을 것이고, 지현의 알리바이도 확인했을 것이다. 노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외부 침입은 아닐 거야. 그럼 내부인데…….”


정민은 잠자코 있었다. 노아가 지현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현과 만나고 나서 남은 의심마저 깨끗하게 정리한 모양이었다. 정민이 봐도 지현은 사건에 관해 너무 아는 게 없었다. 애초에 범행도 불가능하고 동기도 없지만.


두 사람은 다시 화랑관 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멀리서 화랑관의 뒷모습과 조각공원이 보였다. 화랑관의 정면에서는 볼 수 없는 브릿지가 숙소 방향에서는 확실히 보였다. 정민은 앞에서 보는 화랑관도 깔끔하고 예쁘지만 뒷편의 디자인이 브릿지 덕분인지 더 독특한 멋이 있다고 생각했다.


“선배.”


화랑관 주차장에 거의 다왔을 때쯤, 노아가 입을 열었다. 그전까지 노아는 핸드폰을 통해 누군가에게 열심히 연락 중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시간이 되신다고 해서 지금 보러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서정훈 교수님이?”


정민은 반문했다. 정훈이라면 이번 살인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할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외부인이면서도 도훈과의 미팅에 참여했었으니까. 정민 역시 이 부분을 굉장히 수상쩍게 여기고 있었으나 노아의 친척인만큼 일부러 말을 아끼고 있었다.


“당연히 괜찮지. 서교수님한테 연락하고 있었어?”


“작은 아버지랑 이재훈 사장에게요.”


노아가 빙긋 웃었다.


“그날 파티에서 이재훈 사장 연락처를 받았었거든요. 굉장히 선뜻 만나겠다고 하네요. 대신 저녁만 된다고 해요. 그래서 6시에 보기로 약속을 잡았어요.”


“사건 관련인들을 거의 다 오늘 보겠네.”


정민은 노아의 행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아직까지 우리가 못만난 사람들이 누가 있지? 하윤 작가? 그 피아니스트 커플?”


“안 그래도 그 하윤 작가님이란 분 관련해서 선배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노아가 눈을 반짝였다.


“혹시 선배 그 분 연락처 있어요?”


“있긴 해. 왜?”


“그럼 연락해서 오늘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어요?”


“오늘?”


정민은 조금 당황했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그럼 오늘 서교수님에 이재훈 사장에, 하윤 작가까지 다 보겠다고?”


“어차피 작은 아버지랑 이재훈 사장 사이에 시간이 애매하게 비니까요.”


싱글벙글 웃으며 노아가 대답했다. 하아. 정민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연락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솔직히 취재에 응해줄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엮이기 싫어하지 않을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노아가 동의했다.


“하지만 이하윤 씨가 제가 생각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오히려 순순히 만나줄 거예요.”


“네가 생각한대로라면……?”


정민은 입을 다물었다. 노아는 하윤을 일종의 나르시스트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정황상, 어쩌면 노아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알았어. 연락을 해볼게.”


“고마워요, 선배. 혹시 오늘 못만나더라도 문제는 없으니까 신경쓰지 마시구요.”


“그런데,”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정민이 말을 이었다.


“그 피아니스트 여자랑 같이 있던 남자…… 이 두 사람도 동관에서 서관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잖아? 경찰도 용의선상에 올려뒀었고…… 이 두 사람은 안 만나봐?”


“아아. 한서연 씨와 김우섭 씨라고 했죠?”


노아가 기억난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두 사람에 대해 크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연락처가 없긴 하지만…… 주환 작가님 친구들이라고 했으니 주환 작가님을 통해 한 번 만나자고 할 수는 있죠. 그렇게 할까요?”


“그 두 사람은 딱히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야?”


건성인 노아의 태도가 신경 쓰여 정민이 되물었다.


“나도 도훈 작가와 아무 연관도 없는 두 사람이 범인일 것 같진 않지만…… 그 두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근거가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두 사람은 벌써 노아의 차문 앞까지 와있었다. 노아는 차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차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100%는 아니죠. 하지만 전 그 두 사람은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해요.”


문을 열며 노아가 대답했다.


“전 이번 살인사건이 단독범행이라고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인 경우는 아예 범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


정민은 조수석에 탔다. 노아는 별 다른 답변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핸드폰으로 네비게이션을 검색 중이었다. 정민도 대답을 기대하고 반문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용히 있었다. 단독범행. 정민은 잠시 생각해보았으나, 곧 그만두었다. 노아가 무엇을 근거로 단독범행이라고 단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노아의 말이니까, 일단 단독범행 쪽으로 가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윤수진과 박준수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었던 건가.


세명 문화재단 이사이자 화랑관의 실질적인 주인인 윤수진과 그녀의 비서 박준수. 그 두 사람도 동관에서 브릿지를 통과해 서관으로 이동한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경찰도 일단 용의자 목록에 올려는 뒀다고 했다. 하지만 재벌 일가의 일원인 수진을 조사하는 건 경찰에게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노아나 정민 같은 일개 기자들의 요청에 응할 이유도 없었고. 어쩌면 노아도 수진 같은 경우는 취재가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포기한 걸지도 몰랐다.


노아가 차를 출발시켰다.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목적지는 정훈이 일하는 신우 대학 부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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