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는 화랑관 뿐 아니라 한국미술계 전체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것이다. 고 윤창섭 사장과 화랑관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정훈도 아마 교수직을 내려놓음을 물론이고 미술계 자체를 떠나야할 것이다. 그리고 세명 그룹은 미술계 후원을 멈추겠지. 한국미술계는 한순간에 가장 큰 후원자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업계의 쇠퇴를 의미했다.
“강도훈 작가님이…….”
참지 못하고 정민이 입을 열었다.
“이것을 가지고…… 협박을 했다는 건가요? 7월 특별 전시회에서 자신도 포함시켜달라고…….”
“......그렇습니다.”
김준호 관장이 우울한 투로 중얼거렸다.
“7월 전시회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본래 우리 내부정보니까요. 백번양보해서 누군가 내부정보를 흘렸을 수 있다 해도, 사장님의 비밀까지 알아낸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 세 사람만의 비밀이었어요. 화랑관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비밀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노아가 끼어들었다.
“사건을 수사하다가 저도 제보를 받았거든요. 윤창섭 사장님의 수상 당시 안 좋은 소문이 있었다구요. 방금 관장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소문 말입니다.”
“당시에도 그런 소문이 돌긴 했습니다.”
김준호 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했다.
“하지만 어떤 근거가 있어 생긴 소문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장님이 화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지만, 당시에는 더 심했습니다. 사장님은 조롱의 대상이었죠. 주제 모르는 졸부 취급을 받았습니다. 앞에서는 굽신대다 뒤에서는 흉을 보는 자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놈들이 차라리 나았습니다. 자칭 진짜 예술가란 놈들은 대놓고 사장님을 멸시했습니다. 참 웃기는 게 그러면서 돈과 지원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먹었죠.”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김준호 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사장님이 그런 자들 대부분을 제치고 꽤 큰 상을 수상한 겁니다. 질시와 의심이 쏟아졌죠. ‘새벽의 정적’은 확실히 사장님의 재능 이상의 작품이었으니까요. 여기에 사장님의 배경까지 더해져 꺼림칙한 루머가 돌기도 했습니다. 대작을 했다는 소리도 있었고, 세명 그룹에서 심사위원들을 매수했다는 얘기도 있었죠. 그렇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셋을 제외하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셋 중, 누구도 비밀을 발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셋 다 이 비밀에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다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 사람은 운명공동체였다. 그리고 윤창섭 사장이 죽은 지금도 정훈과 김준호 관장은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실수로라도 이 두 사람이 비밀을 발설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도훈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정훈도 김준호 관장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노아 기자님이 말한 루머가 당시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아무 근거가 없었기에 곧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게 벌써 몇십년 전입니다. 사장님의 수상 사실을 기억하는 미술계 관계자도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도훈 작가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요?”
순간 김준호 관장이 목소리가 격양됐다. 울컥한 것 같았다.
“만약 그가 노아 기자님처럼 아무 근거없는 루머나 읊조렸다면 더 듣지도 않고 쫓아냈을 겁니다. 하지만 도훈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진실에 근접해 있었죠. 정훈 교수는 자신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난 그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도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사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누군가에게 얘기를 했고 이것을 도훈 작가가 우연히 알게 됐다……? 하지만 저는 사장님도 결코 그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장님은 그 일을 평생의 수치로 여기셨고 부끄러워하셨으니까요. 사모님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수진 씨는 어떻게 알게된 건가요?”
노아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윤창섭 사장님이 가족에게도 비밀로 했다면 수진 씨도 당연히 몰랐을 것 같은데?”
“몰랐습니다. 이사님도 당연히 몰랐죠.”
수진을 떠올리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는지 김준호 관장이 또 한숨을 쉬었다.
“알린 것은 저입니다. 알리 수밖에 없었죠. 처음에는 이사님께 알리지 않고 저희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도훈 작가가 계속 무리한 요구를 했죠.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사항을 그 하나 때문에 뒤바꿔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도훈 작가는 끈질겼고, 절대 굽히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우리를 협박하고 있긴 했지만, 그의 목적은 우리가 아니었어요. 하윤 작가였죠.”
“하윤 작가의 단독전시회를 망치려 한다…… 그렇게 보신 건가요?”
“그렇게 본 게 아니라 그게 도훈 작가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윤의 고백을 들은 적 없는 김준호 관장은 그렇게 단언했다.
“하윤 작가에 대한 그의 열등감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정말 어떻게든 7월 특별 전시회가 하윤 작가의 독무대가 되는 것만은 막으려 들더군요. 마치 거기에 목숨이라도 건 사람처럼 말입니다. 본래대로라면 택도 없는 일이었지만…… 워낙 큰 약점이 잡혀 있는지라 저희 쪽에서도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결국 하윤 작가의 양해를 구하는 상황까지 갔는데…… 하윤 작가가 양보를 하긴 했는데…….”
아득하다는 듯 김준호 관장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양보라는 것이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죠.”
“알고 있습니다. 공동 전시회로 하되 대부분의 공간에 하윤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조건이었죠.”
“예. 세상 어떤 화가가 그런 조건을 수락하겠습니까? 가뜩이나 하윤 작가에게 독이 오를대로 오른 도훈 작가였는데 하물며…….”
김준호 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윤에 의하면 도훈은 오히려 기꺼이 이 조건을 수락했을 거라고 했지만, 평범한 상식인인 김준호 관장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도훈 작가 한 사람 상대하기도 벅찬데, 이제 하윤 작가 눈치도 봐야했죠. 그런데 그렇다고 도훈 작가의 요구를 안 들어줄 순 없었구요.”
“도훈 작가와의 연락은 누가 담당했습니까?”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하고 노아가 물었다. 김준호 관장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안세민 기획팀장입니다. 애초에 도훈 작가가 이 건과 관련해 처음 연락해온 게 세민 팀장을 통해서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세민 팀장도 도훈 작가가 화랑관을 협박한 것을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김준호 관장이 즉답했다. 세민에 대해 얘기할 때 김준호 관장은 뭔가 씁쓸한 어조였다. 정민은 아마 김준호 관장이 세민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세민 팀장이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요. 하지만 그 이유를 알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우현 부관장님은 그날 미팅에 동석시키셨죠.”
“정우현 부관장에게는…… 결국 알리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김준호 관장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둡게 변했다.
“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절대 그럴 일 따윈 없었겠죠. 수진 이사님에게도, 우현 부관장에게도 이 비밀을 알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수진 이사님은 사장님의 가족이자 이 화랑관의 실질적인 오너입니다. 도훈 작가 건 관련해서 어떻게 대처할지 허락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현 부관장에겐…… 정말 못할 짓을 했지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은퇴하면 앞으로 화랑관을 이끌 사람은 우현 부관장이니까…… 이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제2의 도훈 작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김준호 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섰다. 노아와 정민은 그런 그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았다. 정민은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미술계의 일원으로서 김준호 관장이 저지른 행위의 심각성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고뇌가 깊게 공감이 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면 피해자가 죽은 그날…… 우현 부관장이 미팅에 참여한 건 관장님이 권유하신 일인가요?”
“......우현 부관장이 자원했습니다. 자신이 한 번 도훈 작가를 설득해보겠다고 하더군요.”
“왜 하필 그날 미팅을 잡았나요? 그날은 마주환 작가를 위한 파티가 열리는 날 아니었습니까? 왜 굳이?”
“덕분에 사건 관계자들이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일 기회이기도 했죠.”
뒤돌아보지 않고 김준호 관장이 대답했다.
“도훈 작가는 이미 직접 화랑관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후였습니다. 직접 나와 대면해 협상을 해보겠다는 거였죠. 이를 정훈 교수와 수진 이사님에게도 알렸는데, 두 분 다 협상자리에 동석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정훈 교수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였죠. 수진 이사님은 제가 말렸습니다. 미팅 후의 결과를 알려드릴 테니 일단 기다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수진 이사님도 동의하셨지만, 어쨌든 미팅 중 화랑관 내에서 기다리다가 직후 바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우현 부관장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원해서 미팅에 참석하겠다고 했구요. 때마침 주환 작가를 위한 프라이빗 파티가 열리니, 이걸 핑계로 다들 자연스럽게 모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환 작가와 별 인연도 없는 도훈 작가를 파티에 초대한 것이었구요.”
“그럼 도훈 작가가 파티에 오는 것은 화랑관 직원들은 다 알았습니까?”
“예. 화랑관 직원들은 다 알았습니다.”
“다른 파티 참석자분들은요?”
“아마 대부분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애초에 도훈 작가는 그런 파티에서는 불청객이나 다름 없는 존재라.”
“미팅은 어떠셨습니까. 결과를 보면 수월하게 흘러가진 않은 것 같은데.”
“도훈 작가에게 하윤 작가의 조건을 전달했죠. 도훈 작가는 분기탱천해 길길이 날뛰었구요. 협박을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욕설까지 입에 담았습니다. 패악질이 너무 심해서 저도 몹시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지요. 정훈 교수와 우현 부관장도 화를 삭히느라 꽤 애를 먹었을 겁니다.”
“미팅은 금방 끝난 것으로 압니다.”
“도훈 작가가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요. 일단 도훈 작가에게 좀 더 생각해보라고 권한 후, 우린 우리대로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해야했죠.”
“관장님과 작은 아버지는 5층 도서관에 남으셨죠. 우현 부관장은 바로 떠났구요.”
“우현 부관장 입장에서는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별 말 없이 인사만 하고 떠났습니다. 우린 수진 이사님께 연락했구요. 이사님은 비서와 함께 바로 오셨습니다. 미팅 결과를 알려드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대화를 나눴지만, 사실 뾰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이사님은 계속해서 도훈 작가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짓고 싶어했지만, 제가 만류했습니다. 도훈 작가 성정에 상대가 이사님이라고 해서 성격을 죽일 리가 없으니까요…….”
김준호 관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재미있는 것이라도 있다는 양 뚫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