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신가요, 작가님?”
눈치 빠른 노아가 망설이고 있는 주환에게 먼저 물었다.
“혹시 따로 질문이 있으신가요?”
“예. 다름이 아니라…….”
말끝을 흐리던 것도 잠시, 주환이 결국 본론을 꺼냈다.
“혹시 경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시는지…… 수민 씨는…….”
“안심하세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노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경찰이 수민 씨를 딱히 수상하게 보는 것 같진 않습니다. 혐의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주환의 표정도 덩달아 환해졌다.
“다행입니다. 경찰한테서 따로 연락을 받은 게 없긴 한데, 수민 씨는 좀 불안해하는 것 같더라구요. 기자님 말은 제가 수민 씨에게 꼭 전하겠습니다. 수민 씨한테 많이 도움이 될 겁니다.”
“불안해할만하죠. 이런 사건에 엮이게 된다면 누구라도 말입니다.”
공감한다는 듯 노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환도 맞장구를 쳤다. 정민은 살짝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주환은 이번 사건으로 본인 전시회가 엉망이 됐음에도 수민에 대해서만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보이는 것보다도 그녀에게 더 푹 빠져있는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정민 기자님.”
문득 생각났다는 듯 주환이 이번엔 정민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내일 12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내일요?”
내일 일정이 어땠더라. 정민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주환이 설명했다.
“사건이 장기화 되는 것 같아서 화랑관에서도 슬슬 제 전시회를 다시 재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 점심 시간 동안 화랑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게 됐거든요. 이번 작품 전시회 주제와 각 작품에 대한 제 의도를 짧게라도 나누려고 합니다. 원래부터 계획 중이었던 건데, 이번 사건 때문에 겨우 내일로 일정이 잡혔습니다. 혹시 두 분도 시간이 괜찮으시면…….”
주환의 작품세계에 관한 특강이라. 미술을 사랑하는 일인으로서 정민에게는 한없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였다. 정민은 가능할 것 같다고 일단 대답했다. 부장이 또 화랑관을 간다고 한 소리 할 수도 있겠지만, 못가게 하진 않을 것이다.
“노아 기자님은 어떠십니까?”
주환이 노아에게도 물었다. 정민과 달리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노아로서는 미술 특강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민도 참석하고, 화랑관에서 더 조사할 것도 있었다. 노아는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나 때문이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괜찮아요. 선배 때문만은 아니니까.”
괜히 미안해하는 정민에게 노아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오전 10시 반쯤 만나 함께 화랑관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주환은 서연과 우섭에게 돌아가기 위해 두 사람과 헤어졌다. 노아와 정민은 근처 카페에 앉아 사건 관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이 되기 전 헤어졌다. 노아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정민이 버스를 타면 된다고 거절했다.
“요새 네 차를 너무 얻어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조만간 밥이라도 살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선배.”
싱글벙글 웃으며 노아가 말했다.
“물론 선배와 밥 먹을 기회를 마다하지 않겠지만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다리겠다. 그 말이 정민의 마음속에 묘한 울림을 낳았다. 작은 파문 같았던 울림은 점점 커져 그녀의 마음 자체를 흔들어놓았다. 마치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도 노아와 함께 있으면 이렇게 즐거웠고, 설렜다.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예전 같으면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을 맛봐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아니었다. 그 사건을, 그리고 노아를 떠올렸음에도 울렁이는 불쾌감은 없었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매우 줄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정민은 버스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쩌면 이대로 전부 묻어버리고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과거는 결국 과거일 뿐이니까.
월요일 아침. 노아와 정민이 화랑관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50분이 넘어서였다. 느긋하게 출발한 것도 있었지만, 평소보다 차가 막혀 1시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래도 점심 특강에는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회전문을 통과해 화랑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데스크는 영문 혼자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 자리를 지키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하필 그 일을 영문이 맡고 있다니. 점심 특강에도 제외될 정도로 철저히 조직 내에서 배제당하고 있는 걸까. 정민은 영문을 보며 묘한 안타까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범인일 가능성도 상기하고 괜스레 그의 이모저모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영문은 여전히 안내데스크 직원치고는 고급 정장을 빼입고 있었다. 노아와 정민을 보자마자 기계적으로 웃음을 지어보이긴 했지만, 눈을 보면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내데스크 일에 어떤 의욕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주환 작가님의 점심 특강에 초대받아서 왔습니다.”
“그렇군요.”
영문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두 분 다 게스트로 일단 등록하겠습니다. 3층 중앙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강당 앞에서 런치박스를 나눠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의외로 노아는 영문에게 별 말 하지 않고 바로 그를 지나쳤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갔다. 영문의 말대로 강당 앞에서 직원들이 런치박스를 나눠주고 있었다. 재료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샌드위치와 샐러드, 그리고 생수 한 병이 포함돼 있었다. 노아와 정민은 본인들 몫의 런치박스를 선택한 후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민이 노아에게 속삭였다.
“지현 이모도 오늘 특강 듣는다고 했어.”
“아. 그래요? 그럼 같이 앉을까요?”
“응. 오른편 앞쪽에 있다고 했거든. 거기로 가자.”
3층 중앙관 강당은 최대 300명은 앉을 수 있는 매우 큰 강당이었다. 하지만 오늘 참석자는 대부분 화랑관 직원들이었기에 대부분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직원들 대다수는 중앙좌석 앞쪽에 몰려있었다. 드문드문 뒤편에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다. 노아와 정민은 어렵지 않게 지현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지현 외에도 뜻밖의 인사가 한 명 더 앉아있었다.
“노아야!”
“형님?”
주환에게 초대를 받은 것일까? 재훈도 거기 있었다. 그는 지현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친분이 있는 지현에게 아는 척을 하고 동석을 한 모양이었다. 노아를 본 재훈은 매우 놀라워하면서도 크게 반가워했다. 노아도 환하게 웃으며 재훈에게 말을 걸었다. 두 남자가 진심으로 친분을 쌓은 것 같아서 정민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 됐다. 재훈 같이 허세와 허영으로 점철된 인간과 가까워지는 게 노아에게 좋은 점이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의외의 분들이 많이 오시네.”
정민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재훈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반대쪽 봐. 누가 와있는 줄 알아? 하윤 작가도 왔어.”
“이하윤 작가가 왔다구요?”
깜짝 놀란 정민이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재훈은 대답대신 왼쪽으로 턱짓을 한 번 해보였고, 노아와 정민은 동시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었다. 하윤이 혼자 고고히 왼쪽 좌석 세 번째열 가운데에 앉아있었다. 그도 노아와 정민 쪽을 본 후,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표정이 몽롱한 것이 예의 그 가면을 쓰고 사차원 천재 행세 중인 듯했다.
“하윤 작가가 무슨 일이지?”
“글쎄요.”
노아도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른 화가의 특강 같은 걸 들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과연 그게 뭘까. 정민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강당 중앙석 앞열에는 수민도 앉아 있었다. 수민도 노아와 정민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노아와 정민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민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결 표정이 좋아보였다.
“오?”
뒤를 돌아본 재훈이 감탄사를 토했다.
“서정훈 교수님도 오셨는데? 알고 있었어, 노아?”
“예?”
이번만은 노아도 진심으로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재훈의 말마따나 강당 입구를 통해 정훈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정훈은 노아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중앙석 끝열 구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특강을 들으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 노아가 정훈 쪽으로 다가갔다. 정훈도 노아를 보고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남자는 그 자리에서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리가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웃상인 두 사람 모두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정민은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 사건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 사이 12시가 됐다. 화랑관 직원들과 소수의 초대받은 인원들은 모두 강당에 자리잡은 듯했다. 노아도 정훈과의 대화를 멈추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정민은 지현의 왼쪽 자리에 앉았는데,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특강 시작까지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들 오늘 특강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하시면서 편안하게 들으시길 바랍니다.”
무대에 선 주환이 그렇게 특강을 시작했다. 그는 말을 못하진 않았지만, 재미있게 하는 재주는 없는 사람이었다. 특강은 매우 조용히, 그리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샌드위치는 상당히 맛있었지만, 음식이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잠시였다. 주환의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정민은 그 중 하나였다. 지현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재훈도 경청 중이었다. 아마추어긴 하지만 미술에 관한 그의 관심과 열정만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시간이 이리 긴 시간이었던가.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던 노아는 뒤쪽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기다렸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강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현이었다. 특강에 늦은 그는 왼쪽 좌석 가장 끝열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환도 우현을 본 것 같았지만, 못 본 척 하고 강의를 계속했다.
그러고 또 한 10분쯤 지났을까.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는 이번에도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다른 남자가 강당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이번엔 세민이었다.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가볍게 둘러본 세민은 아무도 없는 오른쪽 좌석 끝열에 앉았다. 의식적으로 우현의 반대쪽에 자리잡았다는 느낌이었다.
업무 때문에 특강에 늦은 모양이군.
우현과 세민의 직위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노아는 다시 앞을 보았다. 주환이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뒤쪽의 스크린에는 그의 작품 중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저런 그림이 전시장에 있었던가. 노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환이 떠드는 내용도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특강이 끝나면 정훈과 일단 못다한 이야기부터 끝내야 하나. 김준호 관장도 다시 한 번 찾아가볼까? 서연이 얘기한 동관 3층 전시장도 들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노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버티는 사이, 특강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세민 이후 특강을 찾은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