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살인 (3)

by 온실라

특강이 끝나고 노아, 정민, 재훈, 그리고 지현은 나란히 강당을 나왔다. 정민과 지현은 주환의 강의가 꽤나 감명 깊었는지 둘이서 뭔가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고, 재훈은 그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공감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노아는 세 사람의 대화를 귓등으로 흘겨 들으며 지금부터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아야.”


정훈이었다. 그는 이미 밖에서 노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정훈과도 더 얘기를 해봐야겠지. 노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탄식 같은 게 들렸다. 노아가 뒤를 돌아보니 하윤이 서있었다. 아무래도 그도 노아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사건의 진행상황 같은 게 궁금할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친절하게 하윤에게 말을 남기고 노아는 정훈에게 먼저 다가갔다. 정훈이 말했다.


“잠깐 단둘이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


“예, 작은 아버지.”


두 사람은 동관 1층의 라운지로 가기로 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는 그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민과 재훈, 지현은 물론 하윤까지도 두 사람의 뒤를 쫓아왔지만, 노아와 정훈은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나머지 네 사람도 굳이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혈육이니 가족간의 사적인 얘기까지 방해하긴 그랬을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니?”


자리를 잡자마자 정훈이 냅다 물었다. 노아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고 윤창섭 사장과 작은 아버지의 관계에 관해 물으시는 거라면…….”


“관장님께서 그에 대해 이미 얘기하셨다고 알려주셨다. 내 말은…….”


“피해자와 가진 미팅에 관해서도 관장님이 얘기해주셨습니다.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는? 정훈이 얼굴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노아의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제게 전부 얘기해주신 것 같진 않아요.”


노아가 대답했다. 사실 노아는 이 점도 궁금하던 터였다.


“느낌에 불과했지만 말이죠. 분명 자포자기해서 다 털어놓는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마음이 변한 건지 이후로는 더 이상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시더군요.”


“본인이 아는 걸 다 얘기해줘서가 아니고?”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요. 느낌이긴 했지만.”


정훈은 깊게 숨을 토했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노아의 특출난 감각을 정훈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본인도 비슷한 센스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더 공감할 것이다. 노아가 그렇게 느꼈다면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오늘 왜 화랑관을 찾은 줄 아니?”


“아뇨. 설마 주환 작가님 특강 때문인가요?”


“아니. 여기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런 특강이 있는지도 몰랐다.”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으며 정훈이 말했다.


“원래는 관장님과 약속이 있었다. 점심 약속이었지.”


“특강 시간에요?”


“그래. 12시.”


“그래서 관장님은 특강에 안 보이셨던 거군요.”


“그래. 원래는 나와 함께 나가서 식사하기로 돼있었지.”


“그런데 약속이 취소가 된 건가요?”


흥미를 느낀 노아가 계속 물었다.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11시 40분이 좀 넘어서 화랑관에 도착했다. 운전 중이라 확인을 못했는데, 도착하니 이메일이 와있더구나. 관장님이 갑작스러운 일정으로 부득이하게 점심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어.”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알겠다고 했지. 자세히 물어보진 못했어. 나중에 물어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시간이라도 때우기 위해 특강을 들었고.”


“화랑관에 남아서 기다리실 계획이었어요?”


그렇다면 취소된 점심 약속이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노아의 마음을 읽었는지 정훈이 바로 설명했다.


“나도 느낌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지만요?”


“오늘 점심이 단순 친목이나 그런 목적 같진 않았어.”


“관장님이 이 사건에 관해 얘기할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는 거죠?”


“관장님은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어. 일단 만나자고만 했지.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다. 목소리를 듣고 말이야. 분명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점심이 취소됐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거다.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꼭 듣고 싶었거든.”


그러다 노아를 마주쳤고, 마주친 김에 지금 이렇게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노아는 그의 눈빛에서 후회와 회한, 수치가 뒤섞인 여러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네게 부끄럽고 미안하구나.”


정훈이 중얼거렸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지. 평생 가슴에 묻어두고 있던 일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조카 앞에 드러나게 되다니. 이래서 죄짓고 살면 안 된다고 하나보다.”


“미술계 관계자 입장에서는 죄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노아가 싱거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전 미술계 관계자가 아니잖아요, 작은 아버지.”


“.......”


“큰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기운 내세요. 전 솔직히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말이라도 고맙구나.”


정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아의 말에 위로를 받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건 아마 본인 스스로가 본인의 과오를 누구보다 무겁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인 그에게 있어 윤창섭 사장의 수상작을 합작한 일은 그 어떤 중범죄보다도 심각한 죄일지도 몰랐다.


노아로부터 사건에 별 다른 진척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훈은 김준호 관장을 다시 만나보기 위해 동관 라운지를 떠났다. 그러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하윤이 기다렸다는 듯 노아에게 다가왔다. 노아는 내심 귀찮았지만 웃는 낯으로 하윤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작가님. 작가님도 특강에 초대받으셨나요?”


“아뇨.”


하윤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급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그는 노아 앞에서는 따로 가면을 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특강은 어쩌다보니 시간이 떠서 듣게 됐습니다. 오늘은 사실 김준호 관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관장님은 무슨 일로?”


“7월에 있을 전시회 얘기를 좀 하려구요.”


“전시회라면 직원 분들과 상의해도 되지 않습니까?”


노아가 은근슬쩍 떠보았다. 하윤은 시시할 정도로 바로 걸려들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단순 전시회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 역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윤의 잘생긴 뺨이 씰룩였다. 그는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기자님과 얘기를 나눈 후 저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셨겠죠.”


태연히 손 놓고 있다가 본인도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다급해졌겠지. 노아는 내심 혀를 찼다. 하윤은 천재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많이 소심한 인간이었다.


“본래 도훈 선배가 관장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관심 밖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도훈 선배라면 제 제의를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으니까요. 하지만 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확신이 없어졌습니다.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지만 혹시…….”


혹시 이 전시회 문제 때문에 도훈이 살해당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노아는 그제야 하윤의 초조한 안색에서 약간의 죄책감도 읽을 수 있었다. 의외였다. 노아는 그를 꽤나 중증의 나르시스트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가 도훈의 죽음과 관련해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도훈 선배의 흥정 대상은 관장님이었겠지요. 그래서 관장님과 직접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체 그날 밤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것인지…… 오늘 아침 갑자기 불쑥 든 생각에 충동적으로 달려오느라 약속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관장님이 오늘은 손님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다더군요.”


하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한 모양이었다. 노아는 살짝 흥미가 일었다. 선약을 잡았느냐 잡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하윤은 정훈과 같은 처지가 된 셈이었다.


“화랑관에는 몇시쯤 도착하신 겁니까?”


“11시가 조금 넘었을 겁니다.”


“관장님이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요. 관장님께 연락을 좀 넣어달라고 했더니 난색을 표하더군요. 결국 사무실에 전화를 한 번 하기는 했는데, 당장은 만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관장님께로부터요?”


“......관장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건 아니고 사무실에 있던 직원이 그렇게 전했습니다.”


헛걸음을 한 하윤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정훈과 같은 선택을 했다. 좀 더 기다리더라도 김준호 관장을 만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다가 12시에 주환의 특강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끼니도 해결할 겸 참석한 것이다.


“다른 직원은 작가님을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까?”


“부관장님이 나중에 내려오시긴 했습니다.”


하윤이 대답했다.


“하지만 7월에 있을 전시회 계획이나 짜러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관장님께 직접 말씀드릴 게 있다고 하고 바로 헤어졌습니다.”


“그랬군요.”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를 만나자고 하신 건?”


“솔직히 얘기해주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하윤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기자님을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경찰 수사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귀뜸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이해하시겠지만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노아가 즉답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작가님이 그렇게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기자님. 그 말은…….”


하윤의 눈이 커졌다. 노아는 못들은 척 딴청을 피우며 대답을 피했다. 하윤도 눈치껏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한시름 놓았는지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아와의 만남 이후 나름 큰 스트레스에 시달려온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기자님. 아무쪼록 이 사건이 하루 빨리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자기 할 말을 마친 하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반면 노아는 자리를 지킨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 오전 김준호 관장은 정훈과의 점심을 취소했을 뿐 아니라 외부손님도 일체 만나지 않았다. 정훈과 미리 약속이 잡혀있었던 것을 보면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상 외의 어떤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문득 노아는 자신의 곁에 정민이 서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노아를 조용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재훈과 지현은 그런 두 사람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둔 채 서있었는데, 마치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정민이 물었다. 이에 노아는 그가 지금 화랑관에 있는 목적을 기억했다. 다시 조사를 시작해야한다.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안갯속. 퍼즐조각들이 필요했다. 이 불가능한 살인을 가능케하는 그림을 완성시킬 조각들이.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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