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저버릴 수 있을까.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by kimsoodahl

칭찬을 계속 받다 보면 그게 내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밥알 하나도 밥그릇에 남기지 않는 것, 쓰레기를 길에 버리지 않는 것, 어디라도 드나들 때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 그것은 나를 착하고 예의 바른 어린이로 만들어주었고 나는 계속 바르고 착한 어린이로 살게 되었다.

목소리가 크고 아이들을 잘 이끄는 것, 공부를 곧잘 하는 것, 가끔 창의성 있는 대답으로 선생님들을 흐뭇하게 하는 것. 그것은 나를 모범생으로 만들어주었고 나는 계속 잘 나가는 학생으로 살게 되었다.

선생님들에게 칭찬받는 학생인 것, 공부를 잘해 과학고에 가는 것, 그러면서도 사춘기조차 없이 부모님과 잘 지내는 것. 그것은 나를 자랑스러운 딸로 만들어주었고 나는 계속 기대에 부응하는 딸로 살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변하지 못했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말 것.이라는 목표 아래 내게 주어진 이 상황을 감사해하며 칭찬으로 만들어진 내 정체성에 따라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계속 살았다. 친구들도 많았고 늘 인사이더였고 밝았고 직업도 확실했고 노후도 보장되었다.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면 연애였다. 특출 난 외모도 아니고 연애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누구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은 내게 남사스러운 일이었고 그만큼 좋은 사람도 없었고 운명적인 사랑은 언젠가 눈앞에 그냥 나타나는 것이라는 그런 판타지를 믿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포지셔닝한 데에는 외모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도 있었다. 살도 빼고 옷도 잘 입고 다니면 연애는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근데 그게 잘 안되었다. 예쁘게 나를 꾸미는 것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고 그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았다. 물론 예쁘게 꾸민다고 누가 나랑 연애해준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이렇든 저렇든 간에 연애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이건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것에 있어서 큰 결격사유는 아니었다. 결혼 적령기가 지나기 전까지는.


이게 문제가 되기 시작한 시점과 내가 내 성적 정체성을 알게 된 시점이 비슷한 것 같다. 연애와 결혼이 가족의 이슈가 되기 시작했고, 나는 나대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결혼까지 잘했다면 나는 완벽한 딸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지금도 드는 나도 참 못 말린다.


어쨌든, 조금의 결격은 있지만 그것을 부모님께 잘하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는 딸로 만회하면서 최근까지 잘 버텨왔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직 꿈도 못 꾸고 계실 나의 정체성은 죄를 짓는 것도, 나를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내 직업을 앗아갈 것도 아니지만, 기대에 부응하는 딸로 계속 살아가게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종종 슬프게 한다.


동성을 좋아하는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왜 믿음을 저버렸다고 생각하느냐고, 진정한 너로 살아가는 게 진짜 효도하는 길이다고, 그게 왜 부모님께 죄송할 일이냐고 친구들은 말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마음들이 남아있다.


내가 나로 살아가서 행복해지는 게 부모님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일일 것이라고 스스로 계속 되뇌어 보지만 아직 자신이 없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자신,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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