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과 요단강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
오랜 기간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고향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산 유대인)로 지냈다. 역사상 가장 긴 민족 유랑이었다.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유대인들은 속속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1800년대 초에도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옛 고향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유대계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원과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소집한 시오니스트 회의를 중심으로 옛 땅에 유대인 수를 늘리는 노력이 이어졌다.
영국이 이 움직임에 동조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주민이었던 아랍인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력 정부를 세우려 했던 영국은 이내 불가능한 목표임을 깨달았다.
유대인들은 이 지역에 ‘하가나(Haganah:히브리어로 방위라는 의미)’라는 민병대를 설립해 이주한 동포들을 보호했다. 하가나는 라빈, 샤미르, 베긴 등 세 명의 이스라엘 총리를 배출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상호 거부감을 확인한 영국은 두 개의 분할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아랍인들은 이마저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 유대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1919년 10만 명에서 2차 대전 후에는 60만 명으로 증가했다.
아랍인의 수도 100만 명까지 폭증했다. 수년 전만해도 40만을 조금 넘길 정도였다. 이민자를 늘리기 위한 시온주의 투쟁은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라는 큰 빚을 진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유대인들에겐 거저 굴러온 땅이 아니었다.
유엔은 1947년 11월 29일 이 지역에 두 개의 국가 안을 의결했다. 아랍인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스라엘 민병대가 100명의 아랍인을 살해하자 그들은 77명의 유대인을 죽이는 것으로 보복했다.
이스라엘은 이듬 해 5월 독립을 선언했다.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5개국이 즉각 이스라엘을 침략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무기와 병력에서 모두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아랍군은 긴 수송라인 탓에 식량과 무기를 적절히 공급하지 못했다. 연합군 사이의 의사소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완승은 아니었다. 겨우 수도인 텔아비브로의 진격을 막아내는데 그쳤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해 주지 않았다. 이스라엘 군은 오히려 체코를 통해 소련제 무기를 제공받았다.
구소련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1948년 전쟁에서 78만 명의 인구 가운데 6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부상자는 3만 명에 달했다.
이스라엘은 수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핵무기까지 개발해 더 이상 통곡의 벽에 기대어 울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비극이 멈춘 것은 아니다.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은 폭발음과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
강을 건너 온 히브리인들은 이편과 저편에 확실한 경계선을 그었다. ‘야곱의 사다리’가 아니고선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이편에겐 천국이, 저편에겐 지옥이 있을 뿐이다.
동양의 장자는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신교는 요단강 이편과 저편을 뚜렷이 구분한다. 이는 비단 유대교뿐만 아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그 경계선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