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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Apr 16.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 63

2. 이스라엘과 요단강 

메시아 

   

이스라엘 대법원은 1967년 예수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자고 촉구했다. 2천 년 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한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아니라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인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열릴 재판은 반드시 이탈리아 로마의 법정에서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스라엘 대법원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책임은 전적으로 로마인 총독 빌라도에게 있었다.   


당시 십자가형은 주로 반(反) 로마 반란 주동자들에게 적용했다. 사형수들이 공개 장소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줘 공포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였다. 로마는 관대한 종교정책, 개방된 시민권 제도를 통해 제국을 유연하게 다스렸지만 저항하는 자들에게까지 너그럽진 않았다. 


로마는 서유럽에서 아프리카북부, 중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속주로 불리는 식민지를 두었다. 속주를 다스리는 로마인 총독에게 부여된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혹독하게 짜내서 많은 세금을 걷어내고, 그에 반항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로마가 유대 속주에 적용한 세율은 전체 소득의 30% 이상이었다. 기껏 농사짓고 장사해서 돈을 벌어 봐야 로마인들에게 다 빼앗기니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유대 땅에는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로마군은 반란을 이유로 한꺼번에 2천명을 십자가에 매단 적도 있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얼마 전 고향 나사렛의 세포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예수는 부모나 이웃들에게 그 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에 따르면 1세기 초 30년 동안 200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15만 명이 민중 봉기로 인해 사망했다. 로마의 탄압이 극심할수록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더욱 간절히 바랐다. 


예수의 고향 나사렛은 반란의 중심지였다. 나사렛은 몇 차례 반란과 그에 따른 로마의 탄압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황폐한 곳으로 변했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예수의 제자 빌립의 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요한복음 1:46”라고 비웃은 것도 그런 연유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속해있다. 갈릴리 사람들을 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은 메말랐다. 랍비 문학가들은 ‘촌뜨기’라는 말로 갈릴리 사람들을 얕보았다. 갈릴리 사투리는 같은 유대인들에게 놀림거리였다. 어떤 지역에선 갈릴리 사람들이 회당에서 구약성서 토라를 낭독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원래 나사렛이라는 말의 어원은 ‘가지’에서 나왔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고 그의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사야서 11:1’ 는 예언을 남겼다.  


예수의 죄목은 내란선동죄였다. 이스라엘 군중들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고발했지만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정치범으로 간주했다. 빌라도는 당시 10년이나 이스라엘 총독 자리에 있었다. 긴 기간 동안 체득한 교훈은 반란의 징후가 있을 시에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원래 총독 관저는 한가로운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탓에 예루살렘의 임시 거처로 옮겼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군중들의 소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로마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빌라도의 식민지 통치 방식이 매우 잔인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그는 가차 없이 군중 소요를 진압했다. 병사들은 무방비 상태의 군중들에게 마구 몽둥이를 휘둘렀다. 


소요의 원인은 빌라도가 예루살렘 성전의 성물을 자신의 물 잔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겐 묵과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를 살려둠으로써 더 큰 소요가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했을 뿐이다.   

    

로마군은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기원전 957년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40년 후였다. 서쪽 벽 일부는 남았다. 유대인들이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 ‘통곡의 벽’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남부 마사다 요새에 모여 마지막 항전을 벌였으나 서기 73년 936명이 모두 자결했다.    

 

그 후 2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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