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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Apr 15.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 62

2. 이스라엘과 요단강 

예루살렘  


기독교는 광야에서 성장했다. 아브라함은 도시를 떠나 광야로 나왔고,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로 이끌었다. 예수는 광야에서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이겨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삼자 이스라엘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됐다. 사울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 우리 안에 넣어진 두 마리 수사자는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 사울의 군사력이 우위였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로 달아났다. 사울은 어린 왕 다윗과 권력을 나눌 의사가 전혀 없었다. 


엔게디 광야는 사해 부근에 위치해 있다. 험악한 산세와 오아시스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소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이처럼 황량하다. 낮에는 40도 이상 기온이 치솟고, 밤이면 한기를 느낄 정도다. 예루살렘 동쪽의 유대사막 1년 강수량은 10㎜ 밖에 안 된다. 내린 비는 금세 말라버린다. 물기를 잃은 흙은 단단해져 식물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은 적국의 왕으로부터 조그만 땅을 얻었다. 적의 적은 곧 아군이었다. 그 땅은 다윗 왕조의 기반이 됐다. 그에 앞서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과 혼인했다. 이로써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 지위를 확보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신분 상승에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사울이 죽자 다윗은 그의 왕조를 흡수했다.


다윗에겐 여인이 끊이지 않았다. 광야 시절에도 인근 유대인 거부의 아내 아비가일을 만났다.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며 다윗을 비웃었던 자였다. 그가 죽은 후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했다. 거부의 재산은 고스란히 다윗에게 넘어왔다. 두 번의 결혼은 다윗의 권력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느 해 봄 다윗은 또 다른 여인을 만났다. 예루살렘 성안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게 된다. 장군의 아내 밧세바였다. 남편은 왕의 명을 받아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다윗은 은밀히 명을 내려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게 유도했다. 다윗과 그 여인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는 일찍 죽었다. 두 번째 아들이 솔로몬이다. ‘평화’와 ‘대신하는 자’라는 이중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다윗의 여인들은 모두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일에 일조했다.  

    

다윗의 왕권은 순탄하지 못했다. 다윗은 사울 사후 유다 지파의 왕으로 옹립됐다. 하지만 나머지 지파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 반쪽에 지나지 않는 왕이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보다 각 지파의 독립성을 더 중시했다.  


다윗은 12지파 중 유대지파의 왕일뿐이었다. 주변 인물들은 툭하면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다윗 스스로도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 -사무엘 하 3:39”고 토로할 정도였다. 스루야는 다윗의 여동생이다. 그에게는 조카들이었다. 다윗은 나중에 아들 솔로몬에게 “그들을 모두 죽여라”는 유언을 남겼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들을 모두 죽여야 했던 태종 이방원의 심정이 다윗의 마음 같았을 것이다. 

다윗 일대기를 쓴 데이비드 울프는 “그의 왕권은 밧세바 사건에 대한 세간의 악화된 여론, 잦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의 어려움, 사울 잔존 세력과의 갈등으로 약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사울은 벤야민 지파였다. 그들은 별도의 나라를 세웠다.


쪼개진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선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로 불렸다. 워낙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이어서 평화를 유지했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한 군데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주인들은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해 성 밖의 우물과 통하는 비밀수로를 만들어두었다. 


다윗은 이 수로를 파괴해 예루살렘 성을 정복했다. 이는 나중에 영화 ‘반지의 제왕 2’ 헬름협곡 전투의 모티브가 됐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후 다윗은 비로소 왕조의 주인 자리를 차지했다.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다윗은 통일 왕조를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소원대로 예루살렘에 묻혔다. 다윗은 쉽게 평할 수 없는 인물이다. 데이비드 울프는 “그는 모순 덩어리다. 고귀함과 밑바닥, 고결한 시인이자 무자비한 정복자다”고 설명했다. 유진 피터슨은 “불행한 아버지였고, 신실하지 못한 남편이었다. 역사적 관점에서만 보면 그는 시적 능력을 지닌 미개한 족장일 뿐이다. 그의 생애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그의 체험과 증언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다윗은 오늘 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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