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래빛 May 10. 2021

소비와 행복의 상관관계

은래빛 에세이


핸드폰 액정이 나갔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벽에 수차례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이는 신혼 때부터 생긴 내 못된 버릇이었는데, 남편과 싸우며 화가 나면 꼭 핸드폰을 집어던지고는 했다.

그는 항상 집에 없어서 통화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나의 핸드폰은 그렇게 항상 액정이 나가거나, 전원이 들어오지 않거나, 폴더폰인 경우 두 동강이 나거나 하는 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남편은 회사원이었는데, 굉-자아아아아앙히 매-애애애애애애우우우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그는 주어진일에 정말로 최선을 다했고, 주말근무도 자주 했고, 집에서도 일을 했다.


퇴근은 당연히 항상 늦었다.

난 주중에 그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회식을 하면 끝까지 참석을 했고, 상사들을 모두 택시에 태워 집으로 귀가시킨 다음 맨 마지막으로 집에 오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아이는 장애가 있었다.

아이를 보육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었다.

그저 아이를 사정거리 안에 두고 다치지 않게 보살피는 정도의 보육만을 한다고 해도 멘탈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는 전혀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고, 바지와 이불에 똥오줌을 갈겼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휘유휘유 으! 아! 아아아~~!! 하는 등의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으로 스킨십을 해주고 동화책을 읽어주며 소통하려고 해도 하등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가 정성스레 읽어주는 책을 덮어버리고 표지에 있는 그림을 가까이 보며 침을 뱉거나 손가락을 이상한 모양으로 흔들곤 했다.


차라리 남의 아이라면 모를까 내 아이의 그런 모습을 지속적인 사랑으로 보살핀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남편이 항상 야근을 한다는 것은, 회사에서 돌아온 내가 잠들 때까지 아이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항상 인내심의 한계를 가져왔고, 난 주기적으로 폭발했다.


그렇게 오늘도 5번째 핸드폰이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남편의 취미는 주말에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러 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건강한 취미였고 권장할만했다.


하지만 그가 자전거를 타며 자유와 해방을 느낄 때 나는 또 혼자서 아이를 돌봐야 했다.

난 그가 취미를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하길 바랬지만, 그도 힘든 회사생활에 지쳐 한숨 돌릴 숨구멍이 필요한 듯했다.

또한 우리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활동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힘들기도 했다.


그래, 내가 조금 희생해서 남편이 더 건강할 수 있다면..

집에서 아이와 그냥 쉰다고 생각하고 내가 좀 더 돌보자..라고 생각하지만

그 한계점을 넘어서는 시점은 갑자기 찾아왔고, 그럴 때는 나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그럴 때는 결혼을 잘못해서 내 인생이 이지경이 되었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이혼을 고민하곤 했다.

어떻게 재산분할을 할지, 양육권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셈하게 되는 것이다.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때우는'식의 인생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위태롭고, 여러 불행의 요인을 가지고 있는 우리 가정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대기업 회사원이었는데, 20대 중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맞벌이를 하며 노력한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집을 장만할 수 있었고 매달 지출되는 아이의 특수치료비를 감안해도 앞으로 큰 경제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만큼의 자산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난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경제적인 여유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비참했을 것이다.


항상 나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운이 좋았던 부분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다.




남편과 싸우고 나서 난 집을 나섰다.

먼저 카페로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아픈 목을 따뜻한 차로 축인 다음, 집에서 버스로 약 다섯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고가 브랜드 아울렛으로 갔다.


거기서 이것저것 옷을 입어본 뒤 맘에 드는 옷으로 하나 결재를 했다.

보라색의 원피스였는데, 가격은 549,000원이었다.

가격표를 보고 식겁했지만, 나에겐 남편 카드가 있었다.

일시불로 긁어주었다.


"고객님 잘 선택하셨어요~ 이게 라스트원 이랍니다! 너무 잘 어울리시더라고요, 어디 모임이라도 가시나요?"

".. 아뇨, 남편이랑 싸우고 와서 하나 사는 거예요"

"어머? 오호호호~ 잘하셨어요~ 이럴 때 또 하나 사는 거죠"

"네.. 코트를 사려고 했는데 계절이 아니라서 없다고 하네요 아쉽게도. 100만 원은 긁으려고 했는데"

"호호호 감사합니다 10월에 또 오세요~"


직원들과 깊이 없는 잡담을 하며 옷을 건네받았다.

그들은 그 순간에만 매우 친절했다.



나는 549,000원짜리 원피스가 들어있는 큰 종이가방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마음에 드는 옷을 샀으면 기쁘고 행복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자꾸 종이가방 안에 있는 보랏빛 천을 흘끔거렸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이 옷의 40% 할인된 가격이 549,000원일 수 있는 건지, 라스트원이라는 건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런 가격의 옷들을 아무렇지 않게 사는 건지 등의 것들이었고,


환불할 때 꼭 필요하다는 영수증이 가방 안에 잘 있는지 급히 손으로 휘저어 눈으로 확인했다.

영수증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왜 화가 나고 남편과 싸우고 나니 소비를 하고 싶어진걸까?


단순히 남편 카드를 써서 소심한 복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돈을 쓰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걸까?



물론 대부분의 경우 소비는 행복하다.


좋아하거나 예쁜 물건을 고르는 과정도 행복하고, 그것을 결재하는 것도 행복하고, 그 물건이 나에게 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행복하다.


그래서 우울감에 빠지거나 슬퍼지면 일부러 기분전환으로 쇼핑을 하는 건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돈을 쓴다는 것은 뭔가 우월감을 느끼게 해 준다.

누군가가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기술과 기교를 다해 만든 물건을 난 그저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돈을 지불하는 순간 그 물건은 즉각적으로 나의 소유가 된다.


말 그대로 내가 지불하는 돈에 대한 보상을 곧바로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 속에 대부분의 일들은 그렇게 즉각적으로 보상받는 경우가 드물다.


내가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은 날 떠날 수 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주어도 그 친구와는 사이가 소원해질 수 있고,


내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 보살펴도 해준이는 오늘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비와 물건에 집착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얻는 작은 '즉각적인 보상'을 '행복'이라과 느끼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나야말로 그 '즉각적인 보상'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게 얄팍한 형태의 물질적인 행복이라고 해도 좋다.

얄팍하면 어떤가?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행복해지기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로서의 나는 그 외에 행복은 다소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 근데 이상하게 저 549,000원짜리 원피스는 왜 사놓고도 행복하지가 않은 거지?


..환불이 7일 이내였나?


..젠장.








<소비와 행복의 상관관계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