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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Sep 24. 2021

나를 시험하는 사람

은래빛 재출근 도전기



그의 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분명 배가 뚱 나오고 머리는 벗어진대다가

납작한 눈에 고집스러운 입매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맞춘 것은 고집스러운 입매 하나뿐이었다.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보통의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작은 눈과 코, 그리고 얇은 입매의

잘생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존재감이 희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사시였다.


나는 움찔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양쪽 눈과 시선을 맞추기 어려웠던 나는 고민 끝에 초점이 맞는 한쪽 눈과만 진지하게 눈을 맞추었다.



그는 아직 나를 다른 부서로 보내는 것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지 출근 첫날 오전부터 날 회의실에 앉혀두고 발령의 가능성에 대해서 오랫동안 열변을 토했다.


"은과장이 민원부서가 싫다면 그 옆 부서로 보내줄 수도 있어!! 어??

발령이 날 수도 있으니 그 부분은 알고 있으라고, 어??"




그는 부서의 가장 구석자리를 가리키며 내게 앉으라 명했다.


그 자리는 우리 부서원들이 한 명도 앉지 않은 라인의 끝자리로, 부서의 바깥쪽을 향해 있는 자리였다.


우리 부서의 바깥쪽이 다행히 벽이 아니라 옆 부서였기에 망정이지


혼자 벽보고 앉았으면 훌쩍거릴 뻔했다.



옛 동료들도 나에게 인사를 와서 이렇게 말했다.


"생뚱맞게 왜 너 혼자 여기 앉아있어? 부서 밖으로 던지기 일보 직전인 거 같은데?"


응 맞아.


난 그냥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고민 끝에 복직했지만, 난 여전히 오전에 한알의 약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로 예전과 같이 힘들고 거친 회사생활이 펼쳐진다면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난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미련 없이 퇴사하자.

내 몸과 마음을 망가뜨려가면서 다시 일할 순 없어.


있는 동안만 사람들과 잘 지내며 일해보자.




복귀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오후가 되자, 그는 나를 다시 회의실로 불렀다.



"그래 뭐, 우리 부서에 오고 싶다고 했으니까, 우리 부서에도 할 일은 아주 많아!

은과장이 일을 잘한다고 하니까 어디 한번 보여주라고, 응?

(해석: 못하기만 해 봐라 넌 바로 민원부서 발령이야)


며칠 휴가만 다녀와도 머리 멍하니 일 안되는데,

은과장은 2년이나 쉬었는데 오죽하겠어?

(해석: 완전 돌머리 되었을 텐데 잘할 리 있냐)


지금 부서는 총 3개 라인으로 업무를 나누어서 돌아가고 있는데,

은과장은 아직 라인은 없어요. 모든 업무를 내가 지시할 테니 그리 알아요.

(해석: 아직 낄 생각하지 마, 내가 하나하나 다 지켜볼 거야)


이 시스템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보고서로 작성해봐요,

3일 내에 상무님께 보고할 수 있도록 완성하도록, 알겠지?"

(해석: 1일 내에 완성해. 상무 보고 d-2일 전 완성 알지?)


"네, 알겠습니다"


난 다년간의 근무경력으로 그의 말을 해석본으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해당 시스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자료가 거의 없었다) 전임자에게 이것저것 묻자, 전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응? 그 자료를 왜 찾아요?

시스템 폐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네?"




이미 폐지하기로 결정된 시스템을 개선하는 보고서를 쓰라는 건 대체 어떤 생각일까?



그래, 그는 날 시험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내는지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장단에 맞춰줘야겠지.



난 없는 자료를 최대한 끌어모으고, 시스템에 직접 들어가 여기저기 살펴보며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음날 오전 11시에 보고서 초안을 완성했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헤엄치듯 보이지만 물속에서는 열나게 발을 휘젓는 백조처럼 일한 결과였다.



시스템 폐지를 결정할 만큼 큰 문제점들이 뭔지, 그걸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안의 경우의 수를 3개 버전으로 나열한 후 각각의 비용/소요기간은 얼만큼인지,

타 우수사례가 주는 시사점과 적용 불가한 점은 무엇인지 빠짐없이 작성했다.


난 집에 가서도 새벽까지 흰 종이 위에 보고서를 쓰고 지우고 반복했다.




"부장님, 여기 부족하지만 보고서 초안입니다"


그는 움찔하더니 잠자코 보고서를 받아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난 조용히 옆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그가 입을 떼었다.


".. 여기 이 사례를 중간으로 넣는 게 좋을 것 같고..  

이 마지막은 작은 표로 수정해봐요"


"네, 수정하겠습니다."


"... 그것만 수정하면 같이 상무님께 보고하러 가자고"




"흠.."


내 보고서를 보던 상무가 말했다.


"은과장, 회사 복귀해서 처음으로 한 업무인데..

잘했어요"


"그러게요, 금방 하더라고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렇게 잘 추진해보자고"





그들의 시험에서 난 다행히 합격점을 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나를 감시하듯 곁눈질을 하거나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자 그는 내게 부서원들 사이에 있는 빈자리로 옮기라고 말했다.



부서 퇴출 일보직전에서 진짜 부서원이 된 순간이었다.




<   계  속   >



데헷 :)


* 이미지 출처 - https://m.blog.naver.com/soraholic90/22017632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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