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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하)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하)>를 읽고...

by 하늘

보여지고, 만져지고, 들리고, 냄새 맡으며, 맛도 보는,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읽힌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접하게 된 작가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 70여년의 삶의 투쟁을 거쳐왔던 그의 내적 몸부림을 따라가기에는 쉽지 않았다. 소리없이 피어오르는 연기, 또는 열기는 있지만 딱히 만져지지 않는 아지랭이 같은 무엇, 곧 그의 삶 속에서 겪었던 처절한 영혼의 투쟁을 어찌 한 번 눈으로 읽었다고해서, 그 몸부림을 헤아릴 수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낯선 이름들의 다양한 신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나로서는, 책을 읽다가 멈추고, 다시 읽고 맥을 잡아보려고 진땀을 빼야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책을 읽고 있던 도중, 어느새 눈이 감겨 있고, 책 내용과는 동떨어진 잡생각으로 가득찼던, 또는 꿈 속에서 헤매는 듯한 나를 자주 깨우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마치, 우리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섞여있는 문장을 한국에 대해 문외한인 외국인이 읽고 있는 느낌과 같지 않을까?




그러나, 튀르키예의 오랜 지배 속에 있어야 했던 그리스, 끊임없던 침탈에 대항하여 싸우는 거친 역사의 길을 가야만 했던 그리스인들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카잔차키스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피 속에 담긴 억센 투사의 강렬함이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작가의 투쟁정신은 구도(求道)의 길을 헤쳐가는 그의 순례의 길을 통해서, 또는 인간이 아닌 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그를 보여준다. 인간을 창조한 신과 같이 작품 속의 인물들을 창조하는 작가로서도, 인간에 의해 오염된 종교에 대항함으로도, 또는 일원화된 해석의 성경이 아닌 자신의 영혼이 해석한 성경 등과 같은 몸부림치는 영혼의 성숙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는 이미 그리스의 철학자 호메로스를 통해서, 파리에서는 베르그송의 제자로서, 그리고 니체의 철학을 만났고, 또 붓다의 가르침의 터널을 지나, 때가 되어 유충이 나비가 되듯이 그 스스로의 날개짓을 하려는 투쟁을 보게 된다. 더불어, 성 프란체스코의 발자취, 알베르트 슈바이처와의 만남, 레닌과 스탈린의 러시아를 보기도 하고, 작가 막심 고리키와의 만남 등과 같은 그의 만남을 짧게나마 남기고 있다. 그러나, 결국엔 영혼의 헤메임 끝에 다시 그의 핏줄로 돌아오는 즉, 그리스인의 피가 섞여있는 그의 영혼으로 돌아옴을 에필로그에서는 담고 있다.




한 번의 독서로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없으리라. 그가 남긴 문장에 그의 영혼의 목소리가 있지만, 보고 있으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기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언젠가 다시 읽을 때가 되면, 그렇게 열매가 무르익을 때가 되면, 나도 그 열매의 단맛을 맛볼 수 있지는 않을까 위로하며 기억속에 남기고 싶은 문장을 아래에 남긴다.


우리들이 죽음을 정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정복이 가능하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이며, 우리들은 다 함게 힘을 모아 신을 창조하고, 신은 인간의 조상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진실.

이제 나는 천국이 침묵과 무관심으로만 가득 찬 암흑의 혼돈임을 깨달았고, 무덤으로 내려갈 때 젊음과 아름다움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았으며, 내 영혼은 더 이상 비겁하고 즐거운 희망이 제공하는 위안을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혼자 길을 나서라! 나아가라! 끝에 다다르면 너는 심연을 발견할지니라. 공포에 떨지 말고 심연을 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을 나는 너에게 요구한다.

나는 신에게, 그대들이 신이라 일컫는 대상에게 내 영혼을 팔고 싶지 않으며, 나는 악마에게, 그대들이 악마라 일컫는 대상에게 내 영혼을 팔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 자신을 팔고 싶지 않다. 나는 자유로다!

난 당신을 돕지 못해요.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길을 찾아 자신을 구원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옛 종교가 죽어 가는 중대하고 무자비한 순간에 산다.

오, 다시 한 번 살아 볼 수만 있다면! 하지만 너무 늦었다. 영원한 시간에서 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 오직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다시는 안 된다.

글을 써가면서 나는 원하지 않아서 피하려고 했던 두 단어가 자꾸만 떠올라 사라지려고 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신>과 <오름(飛上)> 이라는 단어였다.

평생동안 나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오름길만이 신에게로 이끌어 감을 분명히 알았다. 밑으로 내려가거나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직 오름길만이.

우리들은 육체와 비계의 무게에 눌려 영혼을 파괴하고, 우리들이 무엇이며 무엇을 이룩할 능력을 지녔는지 알지 못한채 죽는다.

세 종류의 인간이, 세 가지의 기도가 존재하니까.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한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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