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씨>를 읽고...
공개 처형장에서의 서글픈 여인의 모습, 그녀의 말하지 못함의 젖은 눈망울과 허공 속의 가녀린 손짓, 그리고 글자 하나를 목에 걸고 있는 듯 하다. 그 아래의 대중들은 혀를 차며 제각각 야유를 보내거나, 손가락질을 하며 웅성거린다. 이것이 책에서인지, 영화에서인지,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지난 세월 언젠가 뇌리 속에 그려졌나 보다.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인가, 아니면 어느 모의고사의 지문에서였나? 낯익은 제목인데 반해, 내용은 안개 속에 있다. 정기적인 독서모임의 일정도 꽤나 남았으니, 자연스레 손아귀에 잡힌다. 그리고 어느새 나의 눈동자는 제1장 감옥문을 읽어가고 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으로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던 때로 하고 있다. 실제로,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고조할아버지는 그 당시 행해졌던 마녀재판(죄없는 자들을 사형시키기도 했음)의 재판관이기도 했으며, 이에 대한 수치심으로 자신의 성(Last Name)의 철자를 바꾸기도 했다고 한다(원래는 Hathorne). 아마도 그의 가정사로부터의 경험과 예리한 시선이 합쳐져 그 당시의 엄격했던 청교도주의의 이면, 폐단 혹은 모순 등에 대하여 알리고 싶었고, 결국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는 고전 <주홍글씨>가 탄생된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은 후에, 영화를 접하면서 책에서의 감동을 좀 더 강렬하게 느끼고 싶었다. 간통(Adultary)이라는 "A"로 표시된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헤스터 프린의 삶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고 싶었다. 성스럽고 고귀한 젊은 목사 아서 딤즈데일(Arthur Dimmesdale)의 번민 그리고 결국은 쇠약한 상태로 처형대에서 공개적으로 자인하고 죽음을 맞는 모습을 화면으로 만나고 싶었다. 쾌할하기도 또는 괴팍하기도 한 헤스터의 딸 펄(Pearl)의 모습, 그리고 음흉한 악마의 모습일 것 같은 로저 칠링워스(Roger Chillinworth)의 모습 등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화의 전개를 본다. 책에는 없던 이야기가 앞에 이어지고, 책에 없던 정사를 나누는 씬을 과장한다. '이런 제길...'하면서 영화의 끝부분으로 가 보니, 헤스터와 목사가 같이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이렇게 영화보기는 접기로 한다.
책의 뒷부분에는 <주홍글씨>의 줄거리를 자세히 담고 있다. 이야기 전개에 따른 각 장(chapter)마다의 소제목도 정리정돈된 테그(tag)를 붙힌 듯하다. 나중에 소제목만을 따로 읽어도, 이야기의 흐름을 대략 따라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책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것보다는 헤스터의 "A" 주홍글씨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어떤가? 처음, "A"는 처형대에서의 헤스터에게 주어진 간통(Adultary)죄를 뜻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표시하고 살아가라는 죄값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헤스터는 "A"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일반 시민들과는 격리되어 살아간다.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가는 헤스터의 묵묵한 행동, 봉사하는 삶은 어느덧 '헤스터라면 할 수 있을 것이야'라는 식의 Able의 "A"가 되어간다. 헤스터의 딸 펄(Pearl)이 자라면서 헤스터의 "A"는 펄에게 있어서 엄마라는 표시로 받아들여진다. "A" 주홍글씨가 없음은 헤스터에게는 굴레에서의 벗어남일지 모르겠으나, 펄에게는 100%의 엄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A"를 다시 가슴에 붙힐 때, 펄은 힘껏 엄마를 끌어 안는다. 그러므로 "A"는 그 당시 종교라는 간판아래 행해진 처벌이, 타인에 대한 도움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엄마가 되어가는 것을 보인다 하겠다. 즉, 종교지도자라는 허울의 잣대로 함부로 인간을 처벌하는 병폐를 보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뿐만 아니라, 작품 <주홍글씨>의 전체구성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 다음을 발견해 볼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처형대에서 간통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끝끝내 거부하는 헤스터가 있었지만, 마지막에선 목사 스스로 자신이 간통에 대한 헤스터의 상대였음을 고백한다. 이와 더불어, 처음에는 살아가야 하는 헤스터를 보여주는 반면, 마지막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목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이런 대칭이 숨어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다 하겠다.
끝으로, 책을 읽으면서 밑줄로 표시한 놓치고 싶지 않은 문장들을 남기며 짧은 나의 소감을 마치도록 한다.
그 당시에는 종교와 법률이 거의 동일시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들의 의식에도 종교와 법률이 완전히 용해되어 있어서 공적인 처벌행위는 모두 신성시되어 범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하찮은 형벌도 그 무렵에는 사형에 못지 않은 준엄한 위엄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스러운 자수로 가슴을 장식한 주홍글씨였다. 그 글씨는 주문과 같은 효과를 자아냈고, 헤스터를 평범한 인간관계에서 분리시켜 고립된 세계에 가두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 시민에게는 근검이란 법령으로 이 같은 사치를 금지하고 있었으면서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에게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들 세계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악마의 핏줄이며, 죄를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아이들의 동무가 될 자격이 없었다.
무식한 대중이 자기 눈으로만 사물을 보려 할 경우 대개는 잘못 보기 쉬운 법이다.
목사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어딜 가나 그의 뒤를 따라 다니는 그 양심의 가책이란 충동이었으나, 이 충동 때문에 고백의 일보 직전까지 쫓겨가곤 했지만, 그 순간 양심의 가책의 자매이기도 하고 꼭 붙어 다니는 친구이기도 한 겁쟁이가 떨리는 힘으로 붙잡아서 뒤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주홍글씨가 수녀의 가슴에 걸려 있는 십자가와 같은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주홍글씨는 그것을 달고 있는 이 여인에게 일종의 신성함을 주어 그녀로 하여금 어떤 위험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였다.
사랑이란 새로이 생겨난 것이든 죽음같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든 간에 언제나 햇빛같이 밝은 빛을 만들어 낸다. 그 빛은 사람의 마음 속에 넘쳐 흐를뿐 아니라, 외부 세계에까지 넘쳐 흐르게 된다. 이를테면, 숲이 전과 다름없이 침침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헤스터의 눈에는 빛나 보였을 것이고, 아서 딤스데일의 눈에도 휘황하게 보였을 것이다.
군중들이 자신(목사)을 성자나 천사처럼 숭앙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타락한 여인(헤스터)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둠으로써, 아무리 훌륭한 인간도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실은 한낱 보잘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로 그것(주홍글씨)은 다시는 그녀(헤스터)의 가슴에서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괴롭고 근심에 잠긴, 그리고 헌신적인 헤스터의 일생이 흐르는 동안 주홍글씨는 세상 사람들의 모욕과 비난을 자아내는 낙인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위안을 주는 그 어떤 상징, 또한 두려움과 존경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