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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Slowness)

밀란 쿤데라 <느림>을 읽고...

by 하늘

연휴로 이어지는 holiday weekend이다. 제법 긴 휴일을 보내려니, 이 기회에 책 한 권을 집어든다. 이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통해서 나의 좋아하는 작가로 우뚝 손꼽히고 있는 이, 밀란 쿤데라! 또 다른 그의 작품이다. <느림>,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호기심을 안고 책장을 넘긴다. 역시나 그의 이력은 단 두 줄(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목차나 인사말 같은 겉치레없이 바로 내용이 시작된다. 다시 한번, 소설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그의 음성을 상상하며 되내어 본다.




작품의 중간 부분에서의 아내가 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아닌가?

"종종 당신(밀란쿠)은 내게 언젠가는 단 한 마디도 진지하지 않은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어. 당신의 즐거움을 위한 거대한 장난질을....(생략)"

발간 시기를 보니, 이미 밀란 쿤데라의 많은 대표작들이 발간된 후, 즉, 그의 나이 66세때(1995년)의 작품이다. '나의 추측이 빗겨가진 않은 것 같군...' 중간중간 다문 입술을 벌리며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듣는다. 마치 코미디프로에 빠져서 웃고 있는 것처럼... 겸연쩍기도 했지만, 자연스런 신체 공기의 빠지는 소리가 내 주위를 채운다. "푸~~하하하".




옛날에는 성(城)이었지만 지금은 호텔인 곳으로 주인공인 나는 운전하며 가고 있다. 내 차의 뒤에서 나를 추월하려고 하는 조바심내는 차를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속도라는 주제를 꺼내고, 그에 대한 엑스터시를 갈망하는 인간을 보인다. 이는 자연스럽게 쾌락이라는 주제를 꺼내게 되고, 소설 <느림>속에 있는 또 다른 작품인 비방 드몽의 <내일은 없다>라는 18세기 프랑스 쾌락주의를 대표하는 소설을 소개한다. 덧붙혀, 쾌락의 욕망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지만, 이는 인간이 갖고 있는 정복의 욕망이 앞선다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라는 소설도 언급한다. 소설 <내일은 없다>에서 나오는 쾌락을 추구하는 속도의 느림이, 결국에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이루고, 상대하는 모두를 속이며, T-부인이 갖고자 했던 쾌락도 추구하고, 기사에게는 기억에 오래 간직할 정사의 감동을 채운다. 그에 반해, <느림>에서 등장한 뱅상과 쥘리의 관계는 정사를 가지려고 하는 서두름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어떻게든 빨리 망각하고 싶은 결과를 낳게 된 것을 극명하게 대치시켜 보여준다. 위의 몇 줄 만으로는 밋밋한 결과물이라 하겠지만, 책을 읽어보면 스토리 전개의 코믹쇼를 부담없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에서의 미묘한 착각의 알갱이들이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나타나는 행위의 극명한 차이를 보는 것도 한층 재미를 더 한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밀란 쿤데라의 사람의 세밀한 내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시선에는 언제나 그렇지만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연애의 감정 외에도, 체코학자가 가진 '우울한 긍지'의 경우에서도 심도있게 분석되어 있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에 대한 허상, 또는 뉴스에서 전해지는 표면의 껍질들이 진실일 수 없다는 그의 냉철한 시각도 경험해 볼 수 있다. 춤꾼으로 묘사되는 정치가의 모습이라든가, 경의롭게 여겼던 순간이 한 순간에 경멸할 대상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에, 지금 당장의 칭찬도 진실일 수 없다는 허상을 보기도 한다. 작가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했던 '키치(Kitsch)'가 머릿 속에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빠르게" 문명에 익숙한 우리가 "느림"으로써 잠깐 멈춤의 미학까지 확장해서 해석해 보면 어떨까? 책 안에는 Youtuber로 유명해 지고자 하는 일반인들의 욕망도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탐구에 대한 쿤데라의 관찰자적 시각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를 더 할 것 같다. 작가는 정사의 쾌락을 갈망하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쉽게 정의내리기 힘든 인간 내면의 멈추지 않는 소용돌이의 탐구임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그렇듯이...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나중에라도 한번 더 읽어 볼 만한 문장들을 열거하며 짧은 소감을 마치도록 한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제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한데 차츰 독자는 그들을 유혹하는 것이 쾌락보다는 정복임을 이해하게 된다. 쾌락 욕망이 아니라 정복 욕망이 춤추고 있음을.

오늘의 모든 정치가들이 어느 정도는 다 춤꾼들이요, 모든 춤꾼들이 또 정치에 관여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춤꾼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위험한 편인데, 왜냐하면 어디서나 보이는 투광기들의 빛 아래에서 산책하고 있기에, 그는 세계의 이목에 의해 보호받는 까닭이다.

자신이 생을 한 편의 예술 작품의 소재로 보려는 그 강박 관념 속에 춤꾼의 참 본질이 있어.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우울한 긍지....(중략)... 그 체코 학자의 긍지는 그가 아무 때나 역사의 무대에 오른 게 아니라 그 무대가 밝게 조명된 바로 그 순간에 올랐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 체코 학자는 숭고한 지상의 역사적 뉴스의 은총을 받았다는 데서 긍지를 느낀다.

춤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열정만은 아니며, 그것은 또한 한번 들어서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도로이기도 하다.

경의에서 경멸로 그토록 쉽사리 옮겨 갈 수 있단 말인가.(바로 그렇다네. 이 친구야, 바로 그렇다네.) 공감이란 게 결국 그토록 여리고 그토록 덧없는 것이란 말인가?(물론이라네, 이 친구야, 물론이라네.)

그들은 역사가 연출하는 상황들이 단지 최초의 몇 분만 조명될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어떤 사건도 진행되는 전 기간 동안 뉴스거리가 되는 게 아니며 단지 시작의 매우 짧은 한 시점만 뉴스거리일 뿐이다.

사건들이 너무 빨리 벌어지면 어느 누구도 전혀, 그 무엇이건 전혀,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혔으며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내일은 없다. 청중도 없다. 친구여, 제발 행복하게나. 막연한 느낌이지만, 난 행복할 수 있는 자네 능력에 우리 유일한 희망이 달렸다고 느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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