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을 읽고...
나에게 폭풍처럼 엉겁결에 세차게 다가온 책! 마음 한 구석에는 이미 다른 책을 읽어야 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제목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도대체 모르겠는 또 다른 한 권의 책! <폭풍의 언덕>이 무심코 나의 주변을 스쳐갈 때, 강한 바람에 휩쓸리듯 나의 계획을 날려 버리더니, 일주일간의 틈새 시간동안 단 번에 휘몰아쳐 읽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500여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TV 아침드라마를 책으로 경험한 듯, 깊은 고민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수월한 시간이었다. 이야기 전개의 빠른 속도, 때로는 막장까지 치닫기도 하고, 또는 무르익지 않은 열매를 먹는 느낌도 갖기도 했지만 말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입양된 어린 아이의 '히스클리프'로 시작하여, 그가 죽는 날까지의 시간적인 길이를 담고 있다. 그 동안의 두 집안, 즉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와 스러시크로스(Thrushcross)가(家)내에서 벌어진 악연, 사랑, 복수, 갈등, 죽음, 집착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의 초반부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느껴졌던 어쩔 수 없는 '차별', 그리고 쌓여가는 복수에 대한 결심 등을 엿볼 수 있었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안나 카레니나>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맛 본 이야기로 빠지는 흡인력을 경험했다. 굳이 차이점을 언급하자면, 40대 중후반의 톨스토이나, 50대 후반의 도스토옙스키의 무르익음보다는 20대 후반이었던 에밀리 브론테의 약간은 설익었지만, 젊은 시선의 속도감을 경험해 보았다고나 할까.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폭풍의 언덕> 같은 경우는, 등장인물을 직접 적어가거나, 혹은 인터넷상에서 찾아 펼쳐보며 독서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스토리를 즐길 수 있으리라. 때로는, 마치 다양한 인형들에 줄을 메어 달고, 연신 즐거운 웃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대로 움직이게 하면서, 흠뻑 재미에 빠져있을 20대의 에밀리 브론테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익히 들어봤듯이, 이미 영화나 연극 또는 TV드라마로 손쉽게 우리가 접할 수 있기에, 많은 분들이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더불어 내가 구입한 책의 뒷부분에서는 책의 줄거리도 담고 있기에 굳이 나의 독서 일기장에 그것을 남겨놓을 것까지는 없을 듯 하다.
줄거리를 대신하여, 인물 '히스클리프'에 초점을 맞춰보자. 사랑에서 복수로, 복수에서 잔인함으로, 때로는 집착으로까지 가는 연민의 몸부림,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허함으로 변해가는 그를 주목해 보자. 그렇다, 백인 부유층 가정에 입양되게 된 집시의 자식, 이름도 없었고, 언제 태어난 지도 모른다. 그런 이방인이 캐서린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며, 둘도 없는 단짝이자, 사랑 아니, 때로는 서로의 존재자체가 되어간다. 그 둘을 갈라놓는 힌들리로부터의 학대와 차별... 결국, 자신이 아닌 친척 집안(린튼)으로 결혼을 가게 되는 케서린을 보고, 히스클리프의 마음 속에 자란 복수심, 그것이 집착이 되어 두 가문의 재산을 모두 획득하고, 또 그들 자손들의 삶 또한 무너뜨린다. 지니고 있던 복수의 응어리를 풀고나니, 마음 속 공허함이 삶의 시간을 메운다. 죽어서까지의 캐서린을 향한 열망을 계획하고, 스스로 단식을 선택함으로써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아래와 같이 남기며 작품은 마친다.
저렇게 고요한 땅에 묻힌 사람들이 평온하게 잠들지 못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마치, 삶이라는 시간동안의 몸부림치는 우리 자신에게 남기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과녁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소위 '아둥바둥' 살고 있는가? 그것이 필연적으로 다가 올 죽음앞에서도 쫓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나'는 진정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언젠가 내가 겪는 죽음은 나의 것이지, 타인의 것은 아니잖는가? 삶의 화려함, 분주함, 풍족함 등에 마취되어 평온함과 고요함의 영혼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고요히 땅에 묻히다'를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글자 수가 늘어나는구나.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고자 했던 문장들을 몇 개 남기며 <폭풍의 언덕> 독서일기를 마치도록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변덕스런 존재인가!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에서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그 결심을 실천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을 찾아내어 그 행운에 감사한 나였건만, 나 역시 나약한 인간인지라 저녁 어스름까지 계속 우울과 고독과 싸우다가 결국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어떤 목사도 그 아이들의 순진한 대화 속에 그려진 아름다운 천국보다 더 아름답게 천국을 그려내지는 못했을 거예요.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 슬픔을 불러들이는 법이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오면 나무들이 변해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 사랑도 변해 갈 것을 나는 잘 알아. 그렇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나무 아래에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 같아서, 눈에 보이는 기쁨의 원천은 아니지만 꼭 있어야 하는 거야.
우리 인간은 결국엔 자기 본위가 되나 봅니다.
저건 나의 히스클리프가 아니니까. 난 나의 히스클리프를 사랑할 거야. 그리고 저승까지 데리고 갈 거야. 그는 내 영혼 안에 있으니까.
한쪽은 금덩이인데도 바닥에 까는 돌로 쓰고, 다른 한쪽은 주석인데도 은식기로 보이게 하려고 광을 내어 닦는 격이라고나 할까.
다만 서녘 하늘에 아슴푸레한 호박 빛만이 남아 있었다.
나의 그 맹렬한 노력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끝난단 말인가? 나는 두 집안을 파멸시키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하고 헤라클레스처럼 일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단련해 왔지만, 모든 것이 준비되고 내 힘으로 할 수 있게 되자, 어느쪽 집이든 지붕의 슬테이트 한 장도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지 뭐야!
내 마음은 너무 오랫동안 혼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군.
그러니까 나는 헤어튼의 모습에서 내 불멸의 사랑, 내 권리를 지키려는 열렬한 노력, 나의 비천했던 시절, 나의 자존심, 나의 행복, 나의 고통 등을 보았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