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크로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를 읽고...

by 하늘

'해마다 10월이면 '노벨문학상'을 발표해 왔겠지?' 내 삶의 한 저편에서는 다른 의미있는 사건들이 펼쳐지지만, 스스로 관심갖고 있지 않았으니, 그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니었지 않은가. 새삼스레, 작가 '한강'덕을 보게 되었다. 스쳐가는 10월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소식을 그냥 넘겨버리지 않는 건... 바뀌어 가는 삶의 패턴을 가벼운 미소와 함께 즐긴다. 나의 세상 속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도 한 자리를 내주면서 말이다.




써 보기도 하고, 여러번을 읽어봐도, 작가의 이름이 금새 입에 붙질 않는다. 길기도 하고, 익숙치도 않은 스펠링이며, 책에서 자주 봤음직한 이름도 아니다. 그러고보니, 헝가리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는 셈이다. 딱히, 동유럽의 기억하는 작가는 체코의 '밀란 쿤데라', '프란츠 카프카' 정도이니 말이다. 어쨌든, 내 세상에 들어온 노벨문학상 수상 뉴스! 그렇다면, 당연히 그의 작품 하나정도는 만나봐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한 두 번만의 클릭으로 바로 <사탄탱고>가 나의 스크린에 가득하다. 7시간 정도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도 하며, 연이은 호평이 잇따른다. 당연히 이 작품도 나의 세계 한 켠에 꽂아 놔야하지 않겠는가! 어느새 <사탄탱고>는 나의 손에 쥐어진다. 비록 ebook으로 읽는 것이지만...




1985년 발표, 작가의 나이로 보면, 31세에 출간한 작품이다. 도시와 떨어진 어느 변두리지역(Gyula: 헝가리-루마니아와의 국경지역)의 집단농장, 그리고 그 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등장한다. 이미 다른 일자리를 구했거나, 도시지역의 연고가 있는 이들은 집단농장을 떠난 상태이다. 그렇게 소설은 남아있는 자들의 희망없는 삶에 초점을 맞춘다. 삶의 절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 피폐하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삶, 바뀌는 건 계절이며 다가오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그들에게 다가오는 인물이 있게되고, 고여서 썩어가는 물에 그나마 생명을 느낄 만한 너울이 시작된다. 그 너울은 작품의 첫 머리에서 '종소리'로 암시하고, 또 작품의 결말부분에서도 같은 '종소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의 목차에 대해 잠시 언급을 하자면,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을 이루는 chapter는 1장에서 6장, 그리고 다시 6장에서 1장으로 구성한다. 즉, 소설의 마지막장은 '2부 1장 원이 닫히다'로 끝을 맺는다. 구성자체로 해석하자면, 뭔가 끝이 없을 것 같은 원의 순환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앞으로 갔다가 뒤로 다시 오는 결국엔 제자리임을 보이기도 한다. 문득, 니체의 '영원회귀'가 떠오르는 건, 이 또한 인생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잠깐 상상해 보자. 당신의 오늘은 어제와 같다. 그리고 당신의 내일도 오늘과 다를 바가 없다. 뭔가 의미를 찾아 보려고도 하지만, 살다보니 의미없음이 이미 익숙해져 있고, 뭐 하나 딱히 희망을 걸어 볼 것도 없다. '절망'의 공간에서 힘없이 살고 있는 그대에게 무언가 '변화'의 빗줄기가 비춰온다. 그 빛이 지금의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것 같다. 어느새 빛은 당신의 희망이요, 삶의 지표가 되어간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갇혔다던 절망의 공간을 부숴버릴 수 있게 한다. 그 빛이 내게 와 줄 것을 생각하자니, 흥이 나고 실컷 춤이라도 추고 싶다. (나는 여기서 작가가 왜 <사탄탱고>라는 제목을 선택했는 지를 가늠해 본다.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 어쩌면 죽을 때야 비로소, 당신은 그 빛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신에게 왔던 빛은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도 있고, 또 당신이 없을 먼 미래에도 똑같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너무 수수께끼같은 글을 적은 것 같지만, 책을 읽은 독자라면 무슨 뜻일지 쉽게 공감하리라 기대한다.




오늘도 나는 TV나 라이오에서 연신 세상에 고함치는 이들의 절규를 듣는다. 한창 키치(Kitsch)적 연설을 내밷고 있는 또 다른 '이리미아시'를 본다. 또 그와 같이 보조를 맞추고 있는 '페트리너'를 보고, 그 주위에서 칭찬을 갈구하는 소년 '서니'의 모습들을 본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작품 속의 농장 사람들이 TV속에 나오고 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세계의 어디선가 즐기고 있을 그들만의 '사탄탱고'가 한창일 것이다. 아마도 먼 훗날, 내가 없어진 그 날에도 '사탄탱고'는 끊이지 않을 것이리라.




나의 작은 메모장 한 구석에는 아직 두 개의 질문을 남기고 있다. 왜 에슈티케는 고양이를 그렇게 가혹하게 학대하고 죽였을까? 작가가 에슈티케에 대해 한 장의 chapter를 할애하여 그녀의 죽음을 다룬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나의 독서모임에서 같이 나눌 수 있을 만한 질문으로 남겨두고, 여기서 이만 나의 독서일기를 마치려 한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읽어 보고 싶은 몇 문장들을 함께 남기면서...


그들은 가끔씩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똑같이 닮은 절망으로 서로를 마주한 얼굴들이 있을 뿐이었다.

실은 그는 떠나려고 해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의 그늘 속으로 숨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의 형태와 색을 쓰러뜨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도록 만들며, 움직이던 것은 정지시키는 어둠이 짙게 깔린다.

동쪽 하늘은 뒤늦게 소임을 떠올린 양 이제야 막 훤해지는 중이다. 어둑한 지평선이 불그스레하게 물든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거지가 교회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가슴 아픈 모양으로 태양이 떠올라, 흡사 빛으로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겠다고 다짐하는 듯이, 간밤의 하나같이 차갑고 강고하던 어둠 속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속박돼 있던 나무와 땅과 하늘 그리고 짐승들과 인간들을 마침내 분리하여 풀어준다. 그러고는 패망하여 절망한 군대처럼 아직도 도주 중인 밤과 밤의 끔찍한 요소들이 하늘의 경계 너머로, 서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광경을 태양은 가만히 응시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뇌리를 스치고 가는 그의 파란만장한 쉰두 해의 삶이 불타는 집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처럼 사소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막장에 다다른 이곳 사람들에게는 패배조차 더 이상 가능하지가 않았다. -중략- 이런 퇴화의 결말은 바로 가장 두려운 마비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이 세계라는 돼지우리 속에서 태어나 갇혀 있지.' 그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물 속에서 뒹구는 돼지들처럼 뭐가 어찌된 건지도 모르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젖꼭지를 향해 아우성치지. 사료 통으로 빨리 가려고, 밤이 되면 침대로 돌아가려고 허둥대는 거야.'

지금껏 머물러 살 용기가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떠날 용기가 없었다. 짐을 싸면서, 그는 모든 가능성을 도둑맞고 하나의 덫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덫에 걸릴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기계실과 농장에 갇힌 죄수였지만, 이제는 미지의 위험에 자신을 맡기려 하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는 실수다. 나는 죽음의 종소리를 우렁찬 천국의 종소리와 혼동했다. 비천한 떠돌이! 어디선가 도망 온 미친 늙은이! 그리고 나는 바보였다!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안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사기꾼들과 벌이는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결과는 진즉에 결정되었고 끝내 그는 마지막 무기처럼 지녀온, 안식처로 한 번 더 돌아가고픈 희망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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