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을 읽고...
11월 초입이었다. 년말의 여행계획이 잡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딘가로 갈 목적지가 정해졌다. 미국 동부에서 반대편 서부까지 가야 할 판이다. 당연지사로 가장 먼저 비행기가 떠오른다. 하루 이상의 어디를 갈라치면, 어느새 스며있는 습관적인 계획을 갖는 데에 너무 익숙하다. 뭔가 다른 방식을 갖고 싶다. 그럼 자동차로 가 볼까? 돌아오는 여정을 생각하니 이미 지친다. 그럼 렌트를 해 봐? 아니, 다른 거는 뭐가 있을까? 그래, 기차로 가 볼까? Amtrak 사이트의 여기 저기를 훑어본다. 71시간! Washington DC에서 Seattle까지... DC->Chicago 18시간, transfer로 6시간 정도를 보내고, 그 후 Chicago->Seattle까지 47시간 정도를 내리 굴러가는 시간표다. Ticket을 스쳐보니, 내가 원하는 날이면 아무때고 선택할 수 있을 것 같군... 며칠 두고 보자!
11월 중순경인가? 마음 속으로 이미 Amtrak으로 가 보자고 정한 후다. Ticketing을 하는 웹사이트를 열어보니, 'Sold Out'이 된 날짜가 더러 보인다. 하루를 당겨보기도, 늦춰보기도 해 본다. 서둘러야 겠는 걸... 이렇게 2025년의 Adventure를 정한다. DC에서 Seattle까지 기차로 한번 가 보자. 여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고생이라고 해야 하나? 에잇, 해 보고 후회하는 것이, 안 해보고 동경하는 것보단 낫다! 일단 Ticket을 예약하고, 마음을 다 잡는다. 작년에 어느 산 속(Mt. Misty)의 Cabin에서 책과 함께 보낸 시간이 기억난다. 떨어졌던 낙엽에 괜한 의미를 더해보고, 아직 가지에 매달려 있는 말라가는 나뭇잎을 봤던 기억을 회상하며... 온전히 혼자일 때 보이는 것들을 헤아리는 재미를 상기한다. 그래, 나에게 기억되는 시간으로 보내자!
<여행의 기술> - 영어제목으로는 <The Art of Travel> - 책이 이 시점에 내게 오게 된 것은 단순히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 안에서 이전의 습관화된 여행과는 차별을 둔 여행을 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을 게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여,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니, 달리 바쁜 스케쥴도 없던 한가한 일상이었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히, 때가 되어 내게 온 책이었고, 그 시간을 한껏 누릴 수 있도록 일상이 허락한 책이었 듯 하다. 그만큼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담고자 했던 생각에 깊이 따라갈 수 있었고, 등장하는 안내자로 소개된 예술가들의 경험치를 곱씹어 볼 여유를 누린 시간이었다. 특히, 데생을 하며 관찰하는 동안,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맛을 알게 해 준 '러스킨'의 예는, 작가와 마찬가지의 초등학생 그림 실력인 나로 하여금 도화지와 연필을 갖고 해 봐야 겠다는 의욕의 샘을 자극한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 괴테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팡세> 단장 136
"원래의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닮게 그린 그림에는 감탄하니, 그림이란 얼마나 허망한다." - <팡세> 단장 40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그동안 해 봤다고 한 여행은 어떠했나를 돌아본다. 여행 정보라는 팜플렛이나 인터넷 정보에 휩쓸려, 이미 만들어진 여행경로를 따라가는 데에 급급하지는 않았던가? 별이 몇 개라는 맛집이니, 거기는 가봐야 해, 여긴 이게 유명하니 이건 봐야 돼, 등등... 이미, 다른 이들로부터 경험되어진 것을 확인하는 데에 급급한 나였지 않았나? 단지,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경험치를 쌓는 것을 여행이라고 했던 내가 작아진다. 그렇다. 여행의 온전한 주인공은 '나'이어야 하지 않는가! 책을 통해서, 그 주인공이 온전하게 여행을 즐기기 위해, 어디로 가고, 어떤 것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가질 것인지, 그래서 온전하게 '나'의 여행을 가져 볼 욕구를 갖게 한다. 왜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은 여행이라고 생각지 않았을까? 휴게소나 주유소, 정거장도 여행지가 될 수 있었고, 그곳의 다른 여행자들과의 만담도 수용할 수 있었을 텐데... 나의 인생이 여행이 된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흥미로울까? 나의 일상이 여행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어떠했나? 그렇다, 주위의 아름다움을 찾아보도록 눈을 떠 보자. 책에서 소개 된 바와 같이, 당장 '나의 침실'도 여행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관광객들이 그 앞에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거나 안내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강한 불안을 느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나의 호기심의 나침반이 '미슐랭 가이드 마드리드 편'이라는 이름의 작은 녹색 책자가 발휘하는 뜻밖의 강력한 힘에 흔들리는 대신 자기 나름의 논리에 따라서 방향을 잡았다면, 이런 것들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의 목록에 올라갔을 것이다.
다시한번 나는 내게 말한다. 여행의 주인공은 '나'이어야 한다. 호기심의 원천도 '나'이어야 하고, 느끼는 주체도 '나'이어야 한다. Youtube, 여행책자, AI 추천 등에 '나'의 호기심이 빼앗기거나, 감정이 지배되지 않는 여행을 앞으로 꾸준히 즐기길 바라며 이제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래와 같이 되씹어 볼만한 문장들을 몇몇 남기고, 이를 다시 읽을 그 때에, 지금 갖고 있는 '여행'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할 것을 믿으면서...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 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의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해줄 사람이 없을때 차를 몰고 가야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모든 운송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기차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질 가능성이 있지만, 열차에서 보는 풍경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물어볼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준다. -(중략)-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세상이 너에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퉁이는 예술가들이 그려주거나 글로 써준 후에만 돌아보게 된다는 주장을 완벽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데생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나무 한 그루를 그리는 데는 적어도 10분간의 예리한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예쁜 나무라고 해도 행인을 1분 이상 잡아둘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테크놀로지는 아름다움에 쉽게 다가가게 해줄지 모르지만, 그것을 소유하거나 감상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습관화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다.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의 옆구리를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