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1,2)>을 읽고...

by 하늘

언젠가 히스페닉계 동료 직원이 한국 드라마에 깊이 빠져, 끊일 줄 모르며 연신 보고 있노라는 얘기를 들었다. 왜 그런지를 물어보는 내게, 자기네 드라마는 누구를 죽이고, 총 쏘고, 싸우는 얘기로 가득하단다. 내용이 잔인하고 뻔한 자기네 것들에 비해, 한국드라마는 간장을 녹이는 애절함이나 '썸'을 타는 듯한 간질간질한 맛이 너무 좋단다. '맞아, 나도 동감! 그래서 내가 더욱 한국드라마는 안 봐!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어느새 중독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지... 'Feel 받아 봤던 마지막 한국 드라마가 아마도 '주몽'이었지, 아마...? 후훗...'




읽은 책들의 독서목록을 살펴보니, 작년 여름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이후로, 내게 있어선 딱 두번째 접하는 라틴 아메리카계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어찌보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의 세계이었나 보다. 흔히, 잘 사는 나라로 취급받지 못하다는 이유로, 뉴스나 매스컴상에서는 어쩌다 한 번 지나가는 정도의 나라 이름들이었던 것 같고, 역시나 나의 독서 세상에서도 자연스레 멀리 떨어져 있던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년동안의 고독> 혹은 <백년의 고독>은 부지기수로 귀에 들렸던 작품이었지 않은가! 참고로, 영어제목은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마케팅상, 한국 출판사의 제목을 바꾸는 능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 2025년이 넘어가는 지금, 나의 눈이 책의 문장들을 따라가고, 나의 머리에서는 그리스 신화같은 한 편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고, 나의 노트엔 'ㅃ, ㄸ' 등의 강한 자음이 섞인 익숙치 않은 히스페닉계 이름들로 채워지는 시간을 보낸다. 논리를 따지고 인과관계를 따지고 읽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에 떠맡기며 그때그때의 사건들에 파묻혀 연신 페이지를 넘긴다.




2권 책장의 마지막을 넘긴 후, 혹시 영화로 나온 것이 있을까? 영화로 담기엔 너무 많은 사연들이었나? 아니면 너무 긴 100여년의 시간이었나? 바로 어제 Warner Bros.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공룡기업 Netflix에서 이미 2024년부터 2026년까지 16부작의 에피소드로 절찬 상영중임을 본다. (앞으로 10년후, Disney도 Netflix에 먹히는 거 아니야?) '그러면 그렇지, 당연히 일반 사람들을 끌어 잡을만한 얘깃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소재가 있지 않은가!' '아브라함'이 자기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것 같이,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에 의해 '마꼰도'라는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곳이 황폐해 지기까지 이어지는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러기에, 책의 첫 페이지에 '부엔디아 가계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리라. 자연스럽게 세대를 거쳐 가면서 겪는 가족, 술, 섹스, 근친상간, 전쟁, 자본주의 유입, 정치, 계엄, 죽음 등의 모든 이야기가 신화적 또는 신비적 요소와 결합하여 독자의 눈길을 매혹한다. 각각 겪는 사건은 세대별로 달랐지만, 줄곧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함께 했던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성적 욕망'과 '고독'이었다.




이 중, 모든 인간이 지니고 공감할 수 있는 '성적 욕망'은 구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작품의 제목에서 언급한 '고독'에 관하여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당신은 '고독'에 대하여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 의미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두렵거나 회피하고 싶은 것으로 대할 것인가? 2권의 마지막 부분의 작품해설에서는 '고독'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이 담겨있기는 하나, 그것이 맞다고는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굳이, 작가가 제목에 'History', 'Life'나 'Human' 같은 단어보다 'Solitude(고독)'라는 단어를 왜 선택했을까? 태어나며 죽을 때까지, 가족, 친구, 동반자가 함께 있다 하더라도, 결국 모든 순간은 '나 혼자'였기에 '고독'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걸까? '인생...!' 씹으면 씹을수록, 참 오묘한 주제이기는 하다.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상을 수상할 때의 연설문을 'Solitude of Lartin America'라는 제목으로 작성했다. 그가 얘기하고 싶어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은 어떤 것일까? 그나마 그로 인해서, 모든 세계에 라틴아메리카의 처한 정치적, 폭력적 또는 외세에 의한 피해, 그렇지만 홀로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해졌으리라 해석한다.

아래는 웹사이트 상에서 공유되어 있는 가브리엘 마르케스 노벨상 연설문이다.
https://blog.naver.com/ljj016/220709394264




<백년의 고독>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에는 작가 자신의 아들이나, 아내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작가의 나라 콜롬비아에서 구전되어 전해지는 옛날이야기, 신화 또는 시대적 배경, 정치적 환경, 외세의 침략 등이 뒤섞여 사건의 요소요소를 이룬다. 실제 있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희화한 것들도 녹아 있을테고... 아마도 라틴아메리카 문화, 역사 등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좀 더 사실적이고 재미있게 접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성적 접촉도 동방 유교문화보다는 훨씬 자유로왔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기에, 근친상간의 결과로 돼지꼬리가 달린 아기를 출산할 것이라는 등의 경고가 전해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었을 테고...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한 번쯤은 더 읽어보고 싶은 문장들을 남기며, 이번 독서일기를 마친다.

내가 걱정하는 건 말이야, 자네가 군인들을 너무나도 미워하고, 그들과 전투를 너무 많이 하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했기 때문에 결국 자네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일세. 그토록 비참한 경우를 겪으면서까지 추구할 만큼 고귀한 이상은 이 세상에 없는 법이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자신의 가정사에 관한 것까지도 언급할 정도였다. 하지만 차츰차츰, 그리고 전쟁이 격해지고 확대되어 감에 따라, 그의 이미지는 비현실의 세계 안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부호화된 점과 선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부정확해져 갔으며, 그 점과 선들이 단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서로 모여 조합되었지만, 그 단어들은 점차 모든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는 무한한 권력의 고독 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 방향 감각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중략-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한 고독감을 느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고독의 두꺼운 껍질을 깨뜨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그 껍질을 갉아댔다. 아버지에 이끌려 처음으로 얼음을 구경하러 갔던 그 아득한 어느 오후 이후 그가 유일하게 행복을 느낀 순간들은 은세공 작업실에서 작은 황금 물고기들을 만들면서 흘러갔었다. 근 사십 년 세월을 보내고 난 다음에야 소박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유한지 깨달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서른 두 차례의 전쟁을 벌여야 했고, 전쟁을 통해 맺어진 모든 조약을 죽음을 걸고 위반해야 했으며, 승리의 영광이라는 수렁에 바져 돼지처럼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는 마음속에서 썩어 없어져버린 애정의 흔적이나마 찾아보려고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노년기를 좋게 보내는 비결은 다름이 아니라 고독과 명예로운 조약을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비극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마을 광장으로 모여들어 즐거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것은 고독이 그녀에게 추억을 걸러주고, 살아가면서 그녀의 가슴에 쌓였던 추억의 쓰레기들 가운데 둔감해진 부분을 불살라주고, 나머지 추억, 즉 가장 고통스러운 추억을 순화시키고, 확대시키고, 영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독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오랜 세월 고통 속에서 스스로 비참하게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남들의 자선에 의지해 살면 좋을 거라는 환상 때문에 노년의 삶을 교란당하면서까지 그 특권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꼰도에서 '철도'라는 말이 들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태양 전쟁 계획을 표현했던 설계도와 너무나 유사한, 아우렐리아노 뜨리스떼가 책상 위에 그려놓은 그림 앞에서 우르술라는 시간은 둥그렇게 돈다는 생각을 확인했다.
다시 비참한 고독과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낮이면 군인들은 물이 벙벙하게 찬 길을 돌아다니며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올린 채 아이들과 함께 배가 조난당하는 놀이를 했다. 밤이 되고 통행금지가 실시되면, 그들은 총 개머리판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는 용의자들을 잠자리에서 끌어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여행길로 데려가버렸다.
세월이 방금 전에 수긍했던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원을 그리며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한번 더 몸서리를 쳤다.
그가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노라고 고백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눈물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양피지의 헌사 - '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 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에게 먹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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