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에서 스팀을 다시 여는 하루

by 이재원

오늘은 스팀공급사에서 스팀을 중단하고 배관을 보수하는 날이다.
마음을 졸이며 준비해 왔건만, 출근길부터 기온은 영하 10도.
점심때까지도 영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예보다.
하필이면, 가장 추운 날 중의 하루이다.


아침 8시가 되기 전, 공급 스팀 압력계는 0 bar를 가리켰다.
예고된 중단이었지만, 그 바늘이 바닥에 붙는 순간의 느낌은 언제나 낯설다.
출근한 직원들은 각자의 역할을 확인하며 무전기를 하나씩 챙겼고,
공장은 말없이 분주해졌다.

메인 스팀 배관의 트랩 바이패스를 열어 응축수를 배출한다.
각 동의 공조기 가동을 멈추고, 나중에 다시 투입할 것을 염두에 두며
코일과 배관 속 응축수를 제거한다.
스팀을 사용하는 LN₂ 온수식 기화기는 대기식 기화기로 전환한다.
옥외에 설치된 스팀 트랩들은 하나씩 열어 응축수를 빼내고,
보온이 부족해 보이는 곳은 임시 보온까지 더한다.

몇 개의 생산동과 관리동, 옥외 설비까지 차례로 돌며 확인한다.
공유방에는 사진이 계속 올라오지만,
어느 밸브를 열어두었고, 어느 밸브를 닫아두었는지는
각자 맡은 설비가 다르기에 그나마 혼동을 줄일 수 있다.
그래도 생각한다.
다음에는 큰 항목은 체크리스트로 하고,

밸브에 직접 표시할 수 있는 리본 같은 직관적인 인식 도구도 필요하겠다고.


오전 내내 이어진 스팀 중단 대응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온수 순환펌프, 냉각수 순환펌프, 열매체 순환펌프에서
리크와 고장이 연달아 발생했다.

냉각수와 열매체 펌프는 며칠 전 이미 이상 징후를 발견해 두었던 터라
급히 요청해 둔 업체와 함께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외부 작업장의 방열판에 공급되는 온수 순환펌프는 달랐다.
스팀 공급이 끊긴 사이 외부 배관과 방열판이 동파되었고,
펌프까지 함께 고장 나 버렸다.
베어링 파손으로 보였다.

순환만 시켜주면 동파는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노후된 펌프에게는 그마저도 부담이었나 보다.


스팀은 중단된 지 거의 8시간이 지나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공급사 외부 배관에서
조심스럽게 가열을 시작했다.
압력은 약 1 bar, 공급업체 메인 배관 가열 중이라 아주 서서히 진행 중이다.

정상 압력까지 기다리기엔
이미 설비들이 추위에 노출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우리의 복구 작업 또한 긴 시간을 요구하고 있기에 낮은 압력에서 함께 가열하며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공장 인입 메인 밸브를 아주 조금씩 열었다.
내부 메인 헤더의 압력 변화를 확인하며,
각 지점에서는 무전기로 서로의 상태를 공유했다.
압력은 서서히 찼고, 다행히 헴머링 없이 안정적으로 가열이 진행되었다.

메인 공급 밸브를 조금씩 Open 하며, 동시에 다른 동으로의 공급도 시작했다.
압력 상승은 느렸고, 해머링 없이 다행히 조금 지루할 정도였다.

모든 동의 메인 헤더가 3~4 bar 수준에 도달하고(정상 운전 압력인 6 bar는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공급 상태가 확인되었을 때, 한 동씩 현장 공급을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공조팀의 시간이다.
공조기 하나하나, 배관 속 응축수 제거를 다시 확인하고
스팀을 투입해 코일 상태를 살피며 가열한다.
응축수로 인한 밸브와 관련계기의 고장을 예방하고,
동시에 코일 동파를 막기 위한 과정이다.
공조기 한 대를 마치는 데만도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다른 인원들은 외부에서 동결된 용매 탱크 공급용 스팀 배관을 해동하고 있었다.
스팀을 넣어보지만 드레인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다.
외기는 다시 영하로 떨어졌고, 이미 주변은 어둡다.

이번에는 드레인 쪽으로 스팀을 끌어와 투입했다.
잠시 후, 꿀럭—꿀럭—
마침내 응축수가 토해져 나왔다.
배관 내부로의 스팀 투입이 이번에는 적절한 해동 방법이 되었다.


스팀 투입 과정에서 일부 구간에서는 화재경보가 울렸다.
수신반이 위치한 경비실의 연락을 받고 뛰어 올라간 실험실 천장에는
스팀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원인은 정지된 공조기 내부의 가습 바이패스 밸브를 통해 뿜어져 나온 스팀이었다.
다른 동은 메인 차단을 통해
한 대씩 공조기를 확인하며 스팀을 투입하고 있었지만,
이 구역은 메인 스팀 투입 시 바로 공조기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그 부분을 놓쳤다.

즉시 스팀을 차단하고 공조기를 가동해 환기했다.
작동한 화재감지기를 확인하고 복구한 뒤, 작업은 다시 이어졌다.

유틸리티실마다 다시 점검하고,
빠진 곳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BMS(Building management system)과 현장을 함께 확인하며,
이상 온도와 습도가 없는지 모니터링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다시 확인한 뒤에야 하루의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서로의 미비 사항과 일탈을 정리해 공유하고,
수리가 필요한 부분은 다시 업체와 일정을 조율했다.
모두가 2만 보가 넘는 걸음을 걸은 것 같다.


동파된 곳과 수리가 필요한 장비도 남았다.
날씨 때문이기도 했지만,
노후된 설비를 셧다운 했다가 다시 가동하고,
식은 장비에 스팀을 다시 넣으며 가열하는 과정에서
열교환기 시트가 파손되고,
펌프가 고장 나고,
밸브가 새고,
배관이 터졌다.

조치도 하고, 처리 방향도 결정되었지만,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것들도 남아 있다.
다시 출근해서 정리해야 할 일이다.

늦은 퇴근, 몸은 지쳤지만
그래도 오늘 다시 운전 상태를 만들어낸
담당자들 고맙고, 대견하다.

가장 추운 날에, 가장 뜨거운 일을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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