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세이버 아냐?

수처리설비, 화면이 꺼져도 물은 흐른다.

by 이재원

모든 유틸리티 설비는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반드시 사람의 손길을 거친다.
마치 “괜찮니?” 하고 안부를 묻듯이.


아침은 늘 같은 순서로 시작된다.
익숙한 펌프의 소음, 계측기 바늘이 가리키는 정상 범위, 압력 게이지의 일정한 흔들림, 차압 값, 배관의 미세한 진동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가장 큰 안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어판넬 앞에 서서 모니터링 터치 화면을 통해 시스템 전체를 한 번 더 훑어본다. 이상이 없으면, 오늘도 무사히 출발이다.


아침, 팀 공유방에 짧은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수처리 터치 모니터링 화면 꺼짐으로 점검 중입니다.”


시간당 5㎥ 용량의 수처리 설비.
전처리와 후처리가 정교하게 맞물린, 하루도 멈출 수 없는 장치다.

전처리는 듀얼 미디어 필터와 활성탄, 소프터너, 마이크로 필터, UV를 거치고, 후처리는 RO와 UV, EDI, 마이크로 필터, 울트라 필터, 다시 UV를 지나 현장으로 순환하는 루프로 공급된다. 제어는 PLC(Programable Logic Controller)가 담당하고, 터치 판넬은 그 상태를 보여주는 창이다. 그래서 화면이 꺼졌다고 해서 물까지 멈추지는 않는다.


다행히도, 터치 모니터 스페어는 준비돼 있었다.
몇 해 전, 기존 터치 판넬이 단종되었을 때, 담당자는 신형 판넬을 미리 구매했다.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PLC와 연결해 운전과 세팅 테스트까지 모두 마친 뒤 스페어파트로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전원도 기존 220V뿐 아니라, 신형 판넬을 대비한 24V 전원까지 미리 깔아 두었다.


조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장 난 터치 판넬을 철거하고, 스페어를 설치한 뒤 전원과 통신을 연결하자 터치 화면은 곧바로 살아났다.

“정상입니다.”

연락을 받고 속으로 생각했다. 준비성 하나는 정말 철저하다니까.


그런데 한참 뒤, 현장에서 돌아온 담당자의 표정이 조금 애매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터치화면상 센서 수치도 정상, 펌프도 정상, 시간 설정도 문제없는데 화면에 표시되는 밸브 상태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AI, AO, DO는 모두 정상, 문제는 DI라고 한다.


이쯤 되자 퍼즐이 맞춰진다.

스페어 터치 판넬을 준비해 두었던 그 이후, 이미 15년 넘게 사용하던 구형 PLC가 신형으로 업그레이드되었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설치돼 있던 구형 터치 판넬의 프로그램도 새 PLC에 맞게 업데이트되어 사용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고장 난 구형 터치에는 최신 프로그램이, 스페어로 보관하던 신형 터치에는 구형 PLC 기준의 프로그램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프트웨어 버전과 메모리 맵의 불일치.
DI 신호가 어긋난 이유로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업체 프로그램 엔지니어에게 전화로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전기 담당자는 할 수 있는 일부터 정리했다. PLC와 터치 프로그램을 백업하고, 전원과 통신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수처리 담당자와 함께 터치판넬의 표시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상 이상이 없는지도 꼼꼼히 점검했다.


다행히, 밸브 상태 표시를 제외하면 모든 운전은 정상적이었다. 중앙 서버에 전달되는 상태 모니터링과 기록도 잘 유지되고 있었다.


업체 방문 일정을 잡았고, 고장 난 구형 터치 판넬은 수리가 가능하다면 수리를 맡기기로 했다. 20년 가까이 된 모델이지만, 수리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지금 설치한 신형 터치 역시 이미 몇 년이 지난 모델이다. 단종 여부를 확인해야 하고, 모든 상황이 정리되면 새로운 스페어 터치를 또다시 준비해 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하루였다.
리타이어 계획의 중요성, 스페어 파트의 의미 그리고 변경관리.


터치 화면은 꺼졌지만 물은 흐르고, 그 흐름을 지켜내는 일상이 엔지니어의 하루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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