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비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질소발생장치 리타이어

by 이재원

원료의약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질소는 공기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특히 제품을 건조하는 공정에서는 진공건조와 함께 질소건조가 거의 기본처럼 사용된다. 질소는 불활성 기체라 제품의 산화를 막아주고, 폭발 위험을 낮춰주며, 대류에 의한 열전달로 비교적 균일한 건조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액화질소와 질소발생장치 두 가지 방식을 함께 사용한다.


건조는 대개 오후에 시작되어 밤새 이어지고, 아침이 되면 제품을 수거한다.
자연스럽게 질소 사용은 특정 시간대에 몰리고, 그 외 시간에는 상대적으로 소비량이 많지 않다. 액화질소는 필요할 때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질소발생장치는 전기요금이 저렴한 시간대를 골라 선택적으로 가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액화질소 단가와 전기요금을 함께 놓고 보면, 일정 기준 이상의 사용량에서는 질소발생장치가 경제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균형의 균열이 감지되었다.
질소발생장치의 핵심 공정인 CMS(Carbon Molecular Sieve) 산소 배출구 주변이 밤사이 시커먼 가루가 덮여 마치 오래된 화덕 주변처럼 되어 장비 외벽과 바닥을 덮고 있었다.


질소발생장치의 원리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하다.
PSA 타워 안에 충진 된 CMS라는 미세 기공을 가진 탄소 결정체가 고압 상태에서 산소를 선택적으로 흡착한다. 분자 크기가 작은 산소는 기공 안으로 들어가고, 상대적으로 큰 질소만 통과해 분리된다. 압축과 퍼지의 이 과정을 반복하며 질소를 만들고 산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반복은 재료에게는 엄청난 내구성을 요구한다.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CMS를 교체하고, 부족한 양은 보충하며 최대한 사용해 왔다. 그러나 기한이 되면, 수없이 반복된 압축과 퍼지 끝에 CMS는 점점 제 역할을 잃고 일부는 가루가 되어 PSA 배기 타워를 통해 밖으로 배출된다.


처음 현장을 확인한 담당자는 카본탱크 파손을 의심했다. 하지만 탱크도, 배관도 멀쩡했다. 문제는 내부에서, 아주 오랫동안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비는 이미 올해 리타이어가 계획되어 있던 설비였다. 그래서 이번 상황은 갑작스러운 사고라기보다, 예정된 이별에 가까웠다.


제약공장 설비의 퇴장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그 성능이 유지되고 있음과 안전 측면의 리스크를 정리하고, 이에 따른 영향평가를 수행하고, 변경관리를 거쳐 공식적인 폐기 절차를 밟아야 한다. 수년간 현장에 안정적으로 질소를 공급해 온 노장이, 그렇게 조용히 실무에서 물러나게 된다.


자동차도 처음에는 고장 없이 잘 달린다. 제조장비도 주기적인 PM과 정기적인 OQ를 통해 성능을 유지하며 검증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유지보수를 위한 투입 대비 성능과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 그때는 더 고쳐 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내려놓는 것이 맞는 선택이 된다. 아무리 애정을 갖고 관리해도, 모든 장비에는 수명이 있는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 성능을 유지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주기적인 점검과 학습, 스스로에 대한 OQ로 제 역할을 성실히 해내고 있다고 자만하며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그저 관성으로 돌아가며, 내부에서는 조금씩 마모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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