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란 말, 금지
장비를 오랜 기간 운영하다 보면, 가끔은 이 녀석들이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사람의 감정까지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년 전 일이지만,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다.
무균실 정기 Maintenance를 일주일 앞두고 멀쩡하던 장비가 갑자기 고장 나, 계획보다 일찍 무균실을 열어야 했던 일. '다음 주에 손볼 예정'이라고 업체와 일정조율을 마치자, 마치 서운하다는 듯 새벽에 멈춰버렸던 공조기.
그땐 당황하며 생산팀이며 우리 팀이며, 관련팀들이 어렵게 조율하여 넘겼지만, 이상하게 그런 일은 꼭 예정된 일정 앞서 벌어졌다. 그래서 한때는 일정을 앞두고는 '고장'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도 있었던 것 같다.
최근 한동안 이런 일이 뜸했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요 며칠 다시 비슷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작년까지 오랜 시간 유지보수를 받아오고, 작년을 끝으로 Maintenance를 마무리한 뒤, '올해는 운전 가능할 때까지 가동하고, 고장 나면 철거하자'라고 계획해 둔 유틸리티 장비가 있다.
그런데 이 장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상 신호를 보낸다.
어제는 밸브가 말썽을 부리고, 오늘은 가루가 생기고, 다음 날은 계측기가 오류를 띄운다. 그리고 오늘은 결국 응축수 배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점검을 요구했다.
현장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팀 안에서 농담 반 진담 반 말들이 오간다.
“앞으로 이 설비 앞에서는 ‘철거’라는 말 금지.”, “이제 기계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겠다.”, “다들 말조심”
누군가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잘한다고 칭찬해 줘.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게 아니라, 장비도 잘 돌아가게 해.” 다들 피식 웃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찔린다.
그동안 이 장비를 얼마나 당연하게 써왔는지, 얼마나 ‘곧 없어질 설비’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장비도 결국 사람 손을 통해서 그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제때 관리해 주고, 매일 상태를 점검하고, 작은 이상 신호에 귀 기울여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때는 큰 트러블 없이 역할을 곧잘 해낸다.
반대로 관심에서 멀어지는 순간, 가장 먼저 몸으로 신호를 보낸다.
내일부터는 마음을 조금 바꿔야겠다. '잘 돌아가네. 고맙고 대단해' 한 마디씩 꼭 해줘야겠다.
이렇게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 달라진다. 애정이 생긴달까...
그 태도가 결국 설비의 상태와 현장의 안전, 우리의 하루를 바꾸는 자세가 된다.
당분간 장비 앞에서는 철거 얘기 접어두고, 애정을 담은 찡한 눈빛부터 보내야겠다.
이상하게도, 그게 지금 가장 필요한 예방정비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