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빠름 빠름으로
회사는 늘 기회를 찾는다.
지금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음 한 걸음을 찾기 위해, 늘 새로운 돌파구를 고민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팀에도 이러한 요구가 계속된다. 장비 업그레이드, 시스템 추가 설치, 생산라인 변경, 주차장 부지에 신규 생산동을 짓는 계획안까지. 머릿속과 문서 속에서 수없이 많은 공장이 계획되고 세워진다. 하지만 계획이 실제 투자로 이어져 공사가 시작되기까지의 문턱은 늘 높다. 생각보다 많이 높다.
협력업체들은 항상 좋은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장비업체에 새로운 견적을 요청하고, 최근 업계 동향을 듣는다. 경쟁사들이 어떤 장비를 도입하고 있고, 어떤 공정을 선택했는지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한편이 간질거린다.
'우리는 언제쯤 저런 투자를 할 수 있을까?',
'장비 FAT(장비제작공장에서의 검수) 갈 때, 우리도 좀 데려가 참관하게 해 달라고 할까?'
농담처럼 던지지만, 그 안에는 부러움을 감출 수 없다. 멋진 공장을 짓고, 빵빵한 장비를 들여놓고, 초일류 제품을 만들어내는 그날을 기대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스페어 파트를 하나 더 사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것도 왜 이래 비싸졌냐고 하소연하면서...
오늘, 그 흐름이 조금 달라졌다.
회사가 오랫동안 준비만 해오던 신규 프로젝트가 마침내 암묵적인 결정을 받은 날이었다. 연말에서 연초로, 다시 월말로 미뤄지던 그 프로젝트가 드디어 시작을 알렸다. 늘 그렇듯, 결정은 조용히 내려왔고, 내려오는 순간부터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계획 단계에서 협의되던 목표 일정은 그대로다.
결정이 늦어졌다고 해서 일정이 늦춰지지는 않는다. 줄어든 시간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된다. 우리 팀의 일도 마찬가지다. 생산을 위해 계획된 장비 설치 일정을 맞추려면, 이번 달 안에 자재라도 발주가 나가야 한다. 그래서 공식 문서보다 먼저, 자재 구매를 요청했다. 스케치 수준의 컨셉과 요청 사양을 놓고 디자인 회의를 진행하고, 그동안 다듬어 온 Initial 사용자 요구사항(IURS)을 장비업체에 전달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빠르게 장비 도면 초안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실물이 그려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관련 팀들과의 협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도면이 나오면 결정은 빨라진다. 늘 그랬다.
연구소와 생산팀에서는 필요한 장비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이라는 말로 덮어두었던 요구들이 이제 구체적인 요청으로 바뀌었다.
TF팀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프로젝트를 가져오기 위해 완전 수용적 태도에서, 이제는 “이 일정 안에 어떻게든 끝낸다”는 공격적인 모습으로 전환됐다. 각 팀의 유기적인 움직임에, 우리 팀의 발걸음도 바빠진다. 그리고, 고민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우리 팀도 그동안 준비해 오던 계획안과 URS를 꺼냈다.
이미 여러 장비업체와 협의해 오던 내용들을 정리해 실행 견적을 요청하고, 미팅 일정을 잡았다. 일이 있든 없든, ‘영업’이라는 이름으로 늘 우리의 필요를 채우려 애쓰고, 언제든 준비된 모습으로 함께 달려주는 협력업체들이 이럴 때 정말 고맙다. 이런 순간에 함께 뛰어줄 우수한 파트너가 있다는 건 큰 힘이 된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장비와 설비, 프로세스와 건축이 완벽하게 설계된 뒤 하나하나 발주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 그래서 제작 기간이 가장 긴 장비부터 선 발주하고, 그 장비가 만들어지는 동안 프로세스를 계획하고, 설비와 배관, 건축을 준비한다. 장비가 입고되는 시점에 맞춰 공장을 셧다운 하고, 집중 공사가 이루어진다. 인허가와 관련된 모든 절차도 그 일정에 맞춰 병행된다. 수많은 퍼즐 조각이 짧은 시간 안에 동시에 맞춰진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한국인의 빠름 빠름’ 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장기 프로젝트의 출발선에 섰다.
최근 몇 년간 마음속으로만 갈망해 오던, 멋진 공장의 그림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설렘과 부담이 동시에 느껴진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생각해야 할 것은 더 많다. 이러한 생각의 조각들이 모여,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게다가 멋지기까지 한 공장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해 본다.
오랜만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인제 시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