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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벗 May 04. 2024

변소야화

파란대문집 아이1. 변소 귀신은 되기 싫어!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사달은 꼭 그렇게 시작된다.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요강 금지령이 내려졌다. 푸세식 변소가 있는 집이라면 누구나 애용하던 물건이었기에 느닷없는 금지령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끔찍한 변소를 밤에도 가야 한다는 사실에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그곳으로 말하자면 파리의 한살이를 모두 목도할 수 있는 생태과학관이다. 튀긴 쌀알 같은 허연 구더기가 사방에 바글거리고 무지갯빛 찬란한 똥파리는 커다란 눈을 희번덕거리며 집요하게 먹잇감을 물색한다. 완벽한 그들만의 세계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숙성된 암모니아 냄새다. 막힌 콧구멍도 시원하게 ‘뻥’ 뚫어 주는 통에 도무지 냄새를 피할 길이 없다. 볼일을 보는 시간이 길어질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암모니아로 에어샤워를 한다. 그 냄새가 머리카락에 짙게 배어들면 샴푸향과 어우러져 희괴한 구린내가 진동한다. 하필이면 변소 터줏대감이 되어 버린 귀신도 필시 암모니아 냄새에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오랫동안 함께 한 반려 요강이 사라지자 괜스레 초조해졌다. 저녁 메뉴가 무엇이든 결단코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하필이면 오징어회가 밥상에 떡하니 올라왔다. 얇고 길쭉하게 채 썰어놓은 오징어는 국수 가락 마냥 쫄깃하면서 찰지다. 입안에 넣으면 씹을 겨를도 없이 호로록 빨려 들어간다. 카리스마 넘치는 큰언니는 조잡스러운 젓가락질 대신 숟가락으로 오징어회 반을 덜어 갔고 어린 동생들은 앞다투어 얼마 남지 않은 회를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하지만 나는 딱 한 젓가락이면 충분했다. 굳이 야밤에 변소에 가는 불상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간만에 맛보는 오징어회에 눈이 뒤집힌 큰언니와 동생들에게 변소는 이미 안중에 없는 듯했다. ‘이 불쌍한 중생들아! 너희는 분명 오늘밤 변소 앞에 줄을 서게 될 거야.’ 그 모습을 상상하니 그까짓 오징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밤 9시를 알리는 자명종이 울리자 우리는 각자 잠자리에 들 준비를 시작했다. 분주하게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언니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럴 줄 알았다니까’      

“지금 변소 가야 되니까 따라와.” 

큰언니의 다급한 부름에 나는 득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안돼, 양치질해야 돼.”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어서 따라와.” 

큰언니의 보복이 두렵기도 했지만 실은 그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야간변소행차에 기꺼이 동참했다. 식탐을 다스리지 못한 자의 고달픔은 되려 나에게 굳센 확신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깊고 고요한 밤을 고대하며 잠이 들었다. 아랫배에 강한 통증을 느낀 건 새벽 4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자명종 소리에 몸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생명체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아랫배에 무언가 묵직하게 꿈틀거리더니 이내 뒤틀리기 시작했고 당장이라도 뭔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절박한 마음에 큰언니를 깨워 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는 말은 이 집안 여자들을 두고 한 말이 틀림없다. 뽀득뽀득 이를 갈며 잠들어 있는 동생도 꼴에 여자라고 사정은 마찬가지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서둘러 방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현관문 앞에 섰다. 




현관문을 열면 10보 남짓 떨어진 마당 귀퉁이에 변소가 있다. 그냥 뛰어갈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귀신도 깨어난다는 시간에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한 움큼 ‘훅’하고 들어왔다. 찬 기운에 놀란 몸뚱어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지만 달빛마저 가린 나무들의 검은 음영이 마당에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는 기괴한 형체로 바뀌었고 나의 딱한 속사정도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정말 가든지 싸든지 이판사판이다. 결국 눈을 반쯤 감은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얀 공단 원피스 잠옷에 달빛이 반사되어 음산한 푸른 광택이 살짝 돌았다. 순간 무언가 번뜩하고 뇌리를 스쳤다. 다름 아닌 난국을 헤쳐갈 묘안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부터 소복 입은 처녀 귀신이다.’ 




최면을 걸고 나니 이상하게 두려움이 사라지고 걸음은 빨라졌다. 귀신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완벽했다. 과감하게 변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변소 귀신 생각뿐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대면하는 것보다 빨강 휴지든 파랑 휴지든 뭐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왠지 빨간색보다는 파란색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파란색은 하늘색이다. 그러면 나는 하늘나라로 가야 하는 건가. 아차! 바다도 파란색이다. 옥황상제를 뵈올지 용왕님을 뵈올지 꼼짝없이 저승길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당장 급한 볼일만 보고 나올 요량이었지만 생각만큼 볼일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끝날 듯 말 듯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독한 암모니아 냄새 때문인지 정신은 혼미해졌고 다리에 점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똥통에 빠져 변소 귀신이 되는구나! 하는 순간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성스러운 소리에 의식은 빠르게 깨어났다. 어느덧 마당에 드리워진 음산한 달빛 대신 안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마당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단한 하루는 여섯 식구 아침 밥상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태양이 뜨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아침 밥상이 차려지기 시작하자 전날 밤, 오징어 밥상의 재앙은 마법같이 사라졌고 볼일은 그렇게 모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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