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에게 특효약이 되어 준 그 시절 , 그 곳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대설에 태어난 아이는 유난히 작았다. 그런 탓인지 잔병치레가 끊이질 않았다. 개근상이 제일 큰 상이라고 믿었던 그 시절의 학교는 좀처럼 조퇴를 허용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자,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집에 갈 수 있었기에 어지간히 아파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늘이 노래지고 땅이 들썩거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렵사리 조퇴 허락이 떨어지면 신기하게도 다시 하늘은 파래지고 들썩거리던 땅도 잠잠해졌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 몸은 새털처럼 가벼워져서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긋지긋한 도제식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도 있었지만 성가신 형제자매가 없는 조용한 집에서 엄마를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평소에 먹고 싶은 음식을 독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밥이 전부였던 시절, 외식은 아주 특별한 날 이를테면 졸업식처럼 일생에 한 번뿐인 날 - 에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예외는 있는 법이다. 어머니의 지갑은 철통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지만 맏딸에게 밀리고 외동아들에게 치여 닭다리 한번 잡아보지 못한 둘째 딸에게는 마법처럼 열렸다. 아파야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아이가 아플 때면 어머니는 항상 어디가 아픈지 묻기보다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으셨다.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어머니는 서둘러 빈 냄비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평소에 좋아하던 칼국수를 한 그릇 사다 줄 요량이었다. 배달이 흔치 않았던 때이기도 했지만 한 그릇을 배달할 수 없었던 터라 손수 냄비를 들고 가는 일이 잦았다.
동네 초입에 있는 ‘할매 칼국수’ 집은 제법 이름난 맛집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욕쟁이 할머니가 사납지만 정겹게 앉아서 손님들에게 ‘옜다, 육두문자’ 하실 것 같지만 웬일인지 애젊은 아주머니가 주인장이었다. 작지만 다부진 체형의 아주머니는 일등 요리사처럼 항상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뜨개 모자였는데 한여름에도 닭 볏처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세상 처음 들어보는 요상스러운 억양의 말투는 어쩐지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함을 압도했다. 타지 혁민이 많지 않았던 때라 그런지 그런저런 이유로 아주머니를 둘러싼 소문은 무성했다. 가족들과 함께 탈북을 했다. 강원도에서 사업을 하다 망해서 빚쟁이들 피해 경상도까지 왔다는 둥 소문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좋은 것은 없었다. 평양 맛인지 아리랑 고개 맛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그 집 칼국수는 다른 세상 맛임은 틀림없었다.
역시 국수는 육수 맛이 9할이다. 아주 진한 멸치육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디포리로 우려낸 육수였다. 어느 날, 디포리를 손질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처음 본 나는 ‘역시 예사롭지 않은 가게’라고 생각했다. 디포리는 청어과에 속하는 어류로 밴댕이라고도 불리는데 육수 멸치보다 서너 배는 컸다. 확실히 멸치육수보다 진하고 구수한 향이 나는 걸 보니 녀석은 덩치값을 톡톡히 하는 것 같았다. 칼국수집에서 육수를 끓이는 날이면 어여쁜 디포리 한 마리가 동네방네 헤엄쳐 다니며 숫기 없는 식욕을 자극하는 통에 우리는 졸지에 발정 난 들개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강렬한 냄새 자극에 별수 없이 양쪽 귀 아래쪽이 얼얼해지면 이내 맑고 끈적이는 타액이 쭈욱 쭈욱 분사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럴 때면 콧구멍을 있는 대로 열어젖혀 큰 숨을 들이 킨 다음 코를 통해 들어오는 진한 칼국수 냄새를 꾸역꾸역 혓바닥으로 더듬어 억지로 꿀꺽 삼킨다. 그러면 가히 유들진 칼국수 가닥이 목구멍을 타고 유유히 허기진 위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면발은 제면기로 직접 뽑았는데 제면기는 손님들이 볼 수 있는 계산대 바로 옆에 두고 사용했다. 처음에는 주방에 있어야 할 물건이 전시품처럼 나와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국수를 기다리는 동안 하얀 밀가루 덩어리가 납작하게 눌러져 탱탱한 면발로 거듭나는 모양새를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솔솔 했다. 주인아주머니 혼자 운영하는 가게였기에 대기시간이 꽤나 길었지만 제면기를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음식을 재촉하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칼국수의 고명은 아주 조촐했다. 우동 건조 후레이크에 약간의 김가루와 대파 다진 것이 전부였지만 디포리의 진한 육수와 잘 어우러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할매 칼국수’의 화룡점정은 양파 다대기다. 잘게 다진 양파에 고춧가루를 버무려 숙성시킨 다대기는 양이 많을수록 제맛이다. 양파의 매운맛이 발효되어 달큰하면서 시큼한 맛이 일품이다. 간혹 양파 다대기를 빼고 먹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욕쟁이 할머니가 되어 호통을 치고 싶어 진다. 이건 쌀국수 위에 올려진 고수잎이 아니라 고기 한 점이라고. 그 고기 한 점이 쌀국수– 차돌 쌀국수, 양지 쌀국수 등 -의 정체성을 나타내듯이 양파 다대기는 할매 칼국수의 고귀한 정체성이라고.
칼국수 집 메뉴는 단출했다. 소(⼩), 중(中), 대(⼤)가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항상 소(⼩) 자 한 그릇만 사 오셨다. 왜 당신의 몫은 사 오지 않았냐고 투정을 부렸지만 철없는 아이는 국물 한 모금 남김없이 모두 먹어 치웠다. 아픈 사람은 대개 못 먹기 마련인데 말이다. 뜨끈한 칼국수를 한 그릇 먹고 나면 놀랍게도 신열이 내리고 기운이 났다. 몸에 좋다는 재료를 넣고 오래도록 우린 값비싼 보신탕도 아닌데. 그까짓 칼국수 한 그릇은 어린 소녀가 아프고 힘들 때마다 그야말로 특효약이 되어 주었다. 지천명을 바로 보는 중년이 되도록 몸이 아플 때면 ‘할매 칼국수’ 한 그릇이 간절히 생각난다. 그 속에 녹아있던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과 시절의 정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