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러짐의 미학은 단순한 공존에 있지 않다. 꽃과 나비가 그러하듯 생존과 단단히 결부된 조합일수록 절정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특히 하나의 생존이 다른 하나와 얽혀 있고 그 하나가 또 다른 생존과 엮이고 엮여 불가분의 하나가 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극치. 그것이 다름 아닌 가족이라면 그 아름다움이란 필시 어우러짐으로 하나 되는 풍경에서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음양오행 중 첫 글자인 갑목(甲木)은 갑옷, 즉 거북이 등껍질같이 질긴 씨앗의 껍데기를 뚫고 땅 위로 올라온 나무를 형상화하고 있다. 작은 씨앗에서 아름드리 나무가 되기까지 필연 올차고 강인해야 한다. 나무의 기운을 타고 난 딸아이는 진취적이고 리더십이 강하다. 본인의 주관이 매우 또렷하다 보니 더러 ‘고집불통’일 때가 있다. 하늘 향해 솟구치는 나무가 그러하듯 하나의 목표가 생기면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나 충고를 받아들이기보다 본인의 주관과 고집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고야 만다. 하고 싶은 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일은 백 마디 말에도 끔쩍하지 않는다.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늘그막에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딸인지라 살갑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긴 해도 맏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미더운 아이다. 나무인 딸아이는 흙의 기운이 강한 나에게는 운명의 숙적이다. 진토는 나무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반석이며 성장의 동력이 되는 양분의 온상이니 둘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식처럼 천륜으로 얽혀 있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요구사항이 많은 딸아이가 이따금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언젠가 어여쁜 꽃을 피우고 아람 벌어진 열매를 주렁주렁 달면 부모로서 그만한 보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황소는 근면 성실하다. 특유의 고집 때문에 힘든 날도 많지만, 부지런히 논밭을 갈아 먹거리를 수확하니 나무랄 데 없는 가장이다. 책임감이 강하고 듬직하다. 다만, 고집을 한번 피우기 시작하면 투우사의 붉은 깃발을 보고 흥분한 수소처럼 날뛴다. 그럴 때면 등에 작살을 두어 개 꽂아야 하나 깊은 번뇌에 빠지곤 한다.
엄마의 번뇌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건 언제나 우리집 꼬두라미 아들 녀석이다. 남자아이지만 감정선이 섬세하여 말하지 않은 것까지 모두 읽어낸다. 촛불의 정서를 가진 아이는 착하고 밝고 따뜻하고 공감력이 뛰어나다. 너덧 살 어린아이일 때부터 지하철을 타고 가다 어렵사리 자리가 생기면 엄마를 끌어다 앉히고 지하철에서 내릴 때도 내 발밑을 먼저 살펴주었다. 인생의 험난한 굴곡을 넘을 때마다 굽이굽이 촛불처럼 지켜 주었고 어두운 샛길을 걸을 때도 밝은 달빛이 되어 준 아이다. 낱알같이 흩어진 고운 입자의 흙을 빚고 매만져 불에 구우면 마침내 작품이 되듯이 아이의 곱디고운 심성은 삶에 지쳐 삐득삐득한 엄마의 마음을 한없이 어루만져준다.
흙은 나무에게 귀한 양분을 내어 주고 나무는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태워 기꺼이 땔감이 되어 준다. 땅이 잉태한 소소한 작물들은 우직하고 성실한 황소의 땀으로 비로소 결실한다. 각기 다른 형질의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필연처럼 얽히고 엮여 서로의 심장이 되어 박동한다. 달 밝은 밤, 수목 우거진 드넓은 땅에 황소가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우리 가족의 모습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서 자신의 가정을 이루게 되면 더이상 양분이 되어 주지 못하는 땅도 노쇠한 황소도 사라질 테지만 그 자리를 대신 할 누군가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갈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