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기억한다는 것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갑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매일 수십, 수백 개의 얼굴을 마주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순간들은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습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여전히 저에게 이별이란 익숙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건 제가 욕심이 많아서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과의 모든 순간을, 그 작은 떨림까지도 기억하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
올해 수능이 치러진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오늘은 그날 있었던 두 가지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저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요.
첫 번째 이야기: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고3 담임을 맡으면 수능 감독을 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년부터 고2, 고1을 맡게 되면서 다시 수능 현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사전 감독관 회의가 열린 강당. 낯익은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혹시... 000 선생님이시죠?"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그 얼굴, 그 눈빛, 그 미소. 모든 게 한순간에 되살아났습니다.
"00아,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먼저 이름을 불렀습니다.
"어? 선생님... 제 이름을 기억하세요?"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 아이. 아니, 이제는 '선생님'이 된 그 사람의 눈에 반가운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럼. 너 000 대학교 00 교육과 갔었잖아. 마지막 축제 때 기타 치고 노래하던 거 기억나. 그때 너 진짜 멋있었어."
"선생님..."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금 00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사실 저는 은근히 걱정했었습니다. 그 아이가 워낙 재능이 많아서, 대학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진 않을까 하고요. 음악도 잘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뭔가 더 큰 무대를 꿈꿀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사실 쌤은 네가 진로를 바꿀까 봐 살짝 걱정했어. 근데 너 같은 사람이 교실을 지켜준다는 게 정말 고맙고... 그래, 네가 있으면 아이들이 행복할 것 같아."
"선생님, 며칠 전에요. 저희 학교 축제 때 아이들이랑 같이 무대에 섰어요. 기타 치고 노래도 하고요."
그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아이 안에 제가 심었던 어떤 씨앗이, 이제 그 아이의 제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되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입니다.
저의 이 작은 기억이, 그 제자의 제자에게로, 또 그 아이의 삶 속으로 계속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야기: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
1교시 국어 시험. 수능 교실은 고요했습니다. 샤프 긋는 소리, 한숨 쉬는 소리만이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고개를 떨구더니, 점점 자세가 흐트러지더니, 급기야 완전히 엎드려버렸습니다. 잠이 든 겁니다. OMR 답안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백지 답안지로 처리해야 하나...'
하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며 몇 번 신호를 보냈지만, 다른 수험생들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때 문득 응시현황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출신 고등학교, 그리고 이름.
'관심이구나.'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그 아이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관심이었습니다. 시험 종료 20분 전, 저는 그 아이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작게, 아주 작게 속삭였습니다.
"00야, 20분 남았어."
등을 살며시 두드렸습니다. 아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눈에는 당황스러움과, 미안함과, 그리고 무언가 간절함 같은 게 동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작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문제지를 펼쳤습니다.
그 순간, 저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 넌 잘하고 있어.'
그 아이가 왜 잠들었는지는 모릅니다. 밤새 공부하느라 지쳤을 수도, 극도의 긴장감에 몸이 반응한 것일 수도,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제가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그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관심이라는 온도
학교는 참 신기한 곳입니다. 과거에 심은 관심의 씨앗이 현재의 열매로 맺히기도 하고, 지금 건네는 작은 손길이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건 비단 학교에서 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직장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것,
가정에서 가족의 작은 변화를 알아차려 주는 것,
거리에서 힘들어 보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이 작은 관심들이 모여, 누군가의 오늘을 지탱하고, 내일을 만듭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적절한 순간에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교육이고, 또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닐까요?
에필로그
그날 잠들었던 학생의 수능 결과가 어땠을지, 어떤 대학에 갈지, 어떤 어른이 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10년 전 제가 만났던 그 학생처럼, 언젠가 어디선가 그 아이도 누군가의 등을 토닥여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가 그날 건넸던 그 따뜻함이 다시 한번 되살아날 것이라고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교실로 걸어갑니다.
미래의 제 질문에 온몸으로 답해줄 그런 멋진 사람들을 만나러,
오늘도 교실 문을 엽니다.
아빠쌤 라이언입니다.
가르치고, 기르며,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