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소설 《인생》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늙은 농부 푸구이는 늙고 지친 소 한 마리를 데리고 밭을 갈고 있다.
소가 지쳐 멈추려 할 때마다 그는 소리친다. "얼른 해, 얼른 해! 얼른 해, 펑수이! 얼른 해, 자자!"
지나가던 청년은 푸구이에게 묻는다. 소는 한마리인데 이름은 여러개가 있네요? 그러자 푸구이가 대답했다.
"소가 자기만 밭을 가는 줄 알까 봐 이름을 여러 개 불러서 속이는 거지. 다른 소도 밭을 갈고 있는 줄 알면 기분이 좋을 테니 밭도 신나게 갈지 않겠소?”
존재하지 않는 다른 소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 소를 속이는 것이다. 혼자 밭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기운이 빠질 테니, 다들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신나게 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장면은 묘하게도 현대 경제학의 한 문제를 건드린다.
경제학자 리처드 탈러는 인간의 소비 만족을 두 가지로 나눴다.
취득효용은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느끼는 본질적인 만족이다. 내가 이 물건을 얼마나 원했는가, 그것이 내 삶에 얼마나 유용한가의 문제다.
거래효용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내가 '제값'을 냈는가, 혹은 남들보다 싸게 샀는가에서 오는 만족이다. 쉽게 말하면 바가지를 씌웠거나 당했거나의 감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이 자신의 자산 규모와 무관하게 불공정한 가격에 분노한다는 점이다. 억만장자도 마트에서 같은 물건을 남보다 비싸게 샀다는 사실을 알면 찜찜함을 느낀다.
이것은 손익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함을 향한 본능적 감각이다. 인간은 효용을 극대화하는 기계가 아니라, 공정함의 위반에 내장된 경보 장치를 가진 존재다.
주식시장에서 사람들은 왜 주가가 내렸을 때 오히려 망설이고, 주가가 올랐을 때 더 사려고 달려드는 걸까?
거래효용의 관점에서만 보면 이 행동은 완전히 비합리적이다. 같은 물건을 더 비싸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1만 원짜리 주식이 8천 원이 됐을 때 사는 것이 거래효용상 분명히 이득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람들은 그 순간 오히려 팔거나 외면한다. 반대로 1만 원짜리가 1만 5천 원이 되면 그제야 지갑을 연다.
이것은 취득효용이 거래효용을 압도하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가가 오른다는 것은 단순히 가격이 비싸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신호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 자산이 앞으로도 계속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는 기대의 집합체다.
다시 말해, 주가 상승 자체가 취득효용을 키운다. 내가 이것을 소유함으로써 얻는 만족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오르는 자산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옳은 판단을 한 사람의 집단에 속한다는 소속감이고, 시대의 흐름을 읽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확인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이 어떤 종목으로 수익을 냈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 그 불편함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다. 나는 옳은 판단을 하는 사람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여기에 한 가지 심리가 더 얹힌다. 바로 포모, 즉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다. 인간은 이득을 얻는 기쁨보다 이득을 놓쳤다는 상실감을 훨씬 강하게 느낀다. 주가가 오르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단순히 수익 기회를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탑승한 사람들과 나 사이에 벌어지는 격차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경험이다. 그 격차는 숫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취득효용과 거래효용은 기묘하게 뒤엉킨다. 지금 당장 이 주식을 사도 취득효용을 즉각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 오늘 산다고 해서 오늘 만족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르는 주식을 지금 산다면, 가까운 미래에 취득효용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긴다. 반대로 망설이다가 더 늦어지면, 미래의 취득효용은커녕 거래효용마저 점점 나빠진다. 지금도 비싼데 내일은 더 비싸질지 모른다는 감각이다. 결국 사람들이 오르는 주식 앞에서 느끼는 조급함은 두 가지 공포의 합산이다.
미래의 만족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지금보다 더 불리한 조건에서 사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취득효용의 기대와 거래효용의 악화가 동시에 압박해오는 순간, 사람들은 이성보다 먼저 손가락이 움직인다.
푸구이가 없는 소의 이름을 불렀을 때, 소는 정말로 신나게 밭을 갈았다. 착각이 만들어낸 에너지는 가짜가 아니었다. 주식시장도 비슷하다. 주가가 오를 때 몰려드는 투자자들의 심리가 반드시 어리석음의 산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들이 느끼는 취득효용의 상승은 어느 정도 실재한다. 오르는 자산에 올라타는 것은, 때로는 군중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군중의 에너지를 읽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위화의 소설이 조용히 경고를 남긴다. 푸구이의 소는 결국 늙고 지쳐 쓰러진다. 없는 소의 이름을 아무리 많이 불러도, 혼자 갈아야 할 밭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 거래효용을 무시한 채 취득효용의 상승감에만 올라탔을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소의 이름을 열심히 외치며 홀로 밭을 갈고 있는 셈이다.
좋은 투자자는 두 가지를 모두 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흥분이 취득효용의 진짜 상승인지, 아니면 군중의 이름을 들으며 신나게 달리는 늙은 소의 착각인지를 구별하는 것. 그 구별이 어렵기 때문에 시장은 언제나 흥미롭고, 그 구별에 실패하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손해를 본다.
리처드 탈러 (지은이),박세연 (옮긴이)웅진지식하우스2021-03-11원제 : Misbehaving: The Making of Behavioral Econom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