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책, 인생드라마

-최근 인상 깊게 본 책과 드라마

by 은효

여유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여유, 그리고 편안한 자세로 나의 공간에서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여유. 지난 두 달 동안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에어]와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제인과 지안이라는 두 명의 어린 여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 친구들에게 푹 빠져보는 호사를 누렸다.


마을의 몇몇 엄마들과 세계문학전집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중심으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정해서 읽고, 다 읽고 나면 간단하게 단체 소통방에 감상을 남긴다. 그리고 다음 책으로 넘어간다. 한 번씩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읽기는 각자의 몫이므로 기본적으로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각자의 속도로 읽어나가면 된다. 내가 읽고 있다는 것만 알리고, 읽은 후 간단한 감상을 나누는 아주 느슨하고 가벼운 모임이다.


나는 이 모임의 첫 책으로 [제인에어]를 골랐다. 이 책은 나를 고전의 세계로 이끌어준 첫 책이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적, 우리 엄마는 한 푼 두 푼 아껴 쓰며 모은 돈을 제법 솔솔한 이자를 주겠다는 이웃의 큰손 아줌마에게 빌려주고 떼인 적이 있었다. 그분은 이곳저곳 많은 빚을 내서 쓰고는 돈을 갚지 못하여 결국은 빚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 더러 뭐라도 쓸만한 것을 집어오라며 그 집에 보냈는데, 아버지는 그 집 책장의 책을 모두 가져왔다고 했다. 그래서 어릴 적 우리 집엔 가난한 살림살이에 어울리지 않게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한 당시 부잣집에 장식용으로 꽂혀있곤 했던 양장본 전집책들이 꽤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부활, 적과 흑, 개선문, 여자의 일생,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죄와 벌 같은 책들이 기억난다. 나의 인생책 제인에어도 그 사이에 끼여 있었다. 활자중독 아버지는 집에 있는 이 책들을 평생을 두고 읽고 또 읽으셨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날이었다. 일을 쉬는 날에는 늘 책을 끼고 사셨던 아버지는 그날도 책을 읽고 계셨다. 마침 [제인에어]를 읽고 있던 아버지에게 내가 무슨 책이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고아가 된 여자아이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인데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세로줄의 작은 글자에 책은 낡고 누렇게 바래었다. 그리고 많이 두꺼웠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공녀, 소공자, 장발장 같은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어엿한 청소년이었으므로 얼마 후 이 책들에 도전했고, 그 첫 책은 아버지가 추천해 준 [제인에어]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주인공 제인에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 뭔가 내가 훌쩍 자란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고, 나도 이런 글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아무도 모르게 키워갔다.


이런 인연이 있었던 [제인에어]를 40여 년 잊고 지내다가 최근 두 달에 걸쳐서 아주 천천히 조금씩 음미하며 다시 읽었나갔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제인에어가 깨어남을 느꼈고, 열넷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인에어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집스럽지만 정의롭고, 남의 눈치나 보며 비굴해지지 않고,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을 솔직하게 하는,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제인에어가 너무도 멋지게 보였다. 그래서 그녀처럼 살고 싶었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나에게 비굴함이 아닌 조금의 당당함이라도 있다면, 누군가를 편견 없이 대하고자 하는 자세가 있다면,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려 하지 않는 정직함이 있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인에어를 닮아가고자 한 내 노력의 결실이 아닌가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내가 제인에어와 재회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사이에 보게 되었다. 이미 여러 지인들의 강력 추천을 받은 바 있어 아껴둔 소중한 선물을 꺼내 보듯이 펼쳐보았다.


드라마 속 이지안을 보며, 소설 속의 제인에어가 여러 번 오버랩되었다. 19세기 영국과 21세기 한국이라는 200년을 뛰어넘는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는 묘하게 연결되는 끈이 있었다.


삼만 년을 산 것같이 인생이 지겨운 스물한 살 지안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자신만큼이나 삶이 지겨워 보이는 직장 상사 박동훈 부장의 적나라한 생활을 담은 소리들.

목소리, 숨소리, 발자국 소리, 자동차 소리......

그 소리들은 열여덟의 외로운 고아 소녀 제인에게 사랑의 충만함을 채워주는 손필드 대저택의 주인이자 그녀의 고용주였던 로체스터씨의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과 결은 다르지만 어딘가 닮아있었다. 그건 바로 그 소리들이 외롭고 막막한 삶을 버텨내고 있는 내 어린 친구들에게 위로가 되는 소리, 황량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소리, 희망과 기다림을 만드는 소리였기 때문이리라.


악덕대부업자 광일은 동훈과 몸싸움을 하며


“우리 아버지, 그년이 죽였다고!”


악을 썼다. 순간 정적.


이어폰으로 이 상황을 듣던 지안은 이제 끝이구나... 절망한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동훈의 외침.


“나 같아도 죽여, 내 식구 패는 새끼들은.... 다 죽여-!”


순간 지안은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며 통곡한다.



이 드라마 또한 놓친 대사는 다시 돌려보기 하면서 아주 천천히 보았다. 너무도 인간적인 동훈에게 풍덩 빠지고, 지쳐있는 지안의 상처와 치유에 한몸이 되었다. 정희의 실연에 함께 울고, 유라와 기훈의 좌절과 도전을 유쾌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 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후계동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의 모습에서 푸근한 정이 솟아났다. 이렇게 인생책에 이어 나의 인생 드라마가 탄생하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 소녀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삶을 이끌어낸 제인에어를 지금까지 품고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지안의 아저씨 동훈처럼, 동훈의 어린 친구 지안처럼 헛헛해하는 누군가에게 주먹 살짝 들어 “파이팅!”하며 힘을 주고,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냐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냐”라고 위로를 건네며 그렇게 마을 속에서 느슨하게 살아가고 싶다.


드라마가 끝난 후 대본집을 빌려다 보았다. 드라마를 다시 보는 듯했다. 조만간 이 드라마를 한번 더 볼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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