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재미난 마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부모 못지않게 한 몫을 해내시는 분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손녀의 전화 한 통이면 오토바이와 함께 어디선가 대기 중이었다는 듯 번개처럼 나타나는 하늘이 할아버지가 제일 유명하지 않을까 한다. 재미난 마을 골목골목에서 하늘이와 우주 자매를 태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딸 승원이도 가끔씩 할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는 행운을 누린 날에는 집으로 돌아와서 자랑을 하곤 했다. 그런 할아버지를 한동안 자주 뵐 수 가 없었다.
하늘이 엄마 긍정에게 물어보았더니, 시부모님께서는 얼마 전 귀촌하셨다고 했다.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사는 동네에 적당한 집이 나와서 그 집으로 이사를 가셨다는 것. 우리 마을과도 많이 멀지 않아서 사시는 집을 처분하지 않고 자주 왔다 갔다 하신다고 했다. 화단도 가꾸시고 텃밭농사도 지으시면서 즐겁게 잘 지내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는 작년에 재미난 학교를 졸업했고, 동생인 우주는 이제 6학년이 되었다. 당신들께서 할 일을 다했다고 판단하신 그분들은 다시 그분들의 길을 찾아가신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귀촌한 하늘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리고 그날 밤 자려고 누워서 눈을 감았을 때, 나는 빨간 장미 울타리로 둘러싸인 어느 시골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어른 허리 정도 오는 나무 대문을 지나면 작은 별채를 먼저 만난다. 그곳엔 화장실과 샤워실까지 갖추어져 있어 손님들이 오면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다. 요며칠은 나의 고등학교 적 친구가 와서 묵고있다.
건너편 본채도 아담하다. 3분의 2는 주거용으로, 3분의 1 정도는 창고로 쓰고 있다. 주거공간에는 거실과 주방, 욕실, 그리고 작은 방 한 칸이 전부다. 거실 옆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다락방이 있는데, 다락방 지붕에 난 창으로 맑은 날 밤엔 별을 바라볼 수 있다. 만약에 나에게 손주가 생긴다면 이 공간을 선물로 주고 싶다. 창고의 선반에는 각종 농기구들이 가지런하게 잘 정돈되어있다.
집은 작지만 마당은 꽤 넓다. 그리고 집 뒤뜰과 연결된 곳에 텃밭도 있다. 마당 한편엔 봄이면 수국이 피고 가을이면 들국화가 장식하는 화단이 있다. 그 옆에는 수돗가와 장독대. 제법 큰 항아리에는 간장과 된장이 수북이 담겨있다. 뒤뜰에는 대추나무와 감나무, 무화과나무가 키가 크게 솟아있고, 담장을 따라서는 봄부터 여름까지 붉은 장미가 시골집답지 않게 화려하게 집을 감싸 안고 있다.
나는 챙이 넓은 꽃무늬 모자를 쓰고 마당을 지나서 텃밭으로 간다. 텃밭에는 여러 종류의 상추,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텃밭 가장자리로는 옥수수가 줄을 서 있고 호박과 수세미도 넝쿨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감자를 캐고 난 밭에는 고구마를 심었다. 콩도 심고, 팥도 심고, 마늘도 심었다. 대파는 공중으로 힘차게 쭉쭉 뻗어 올라있고, 그 옆 부추는 난초처럼 휘어져 하늘거린다. 초록 빛깔 텃밭에 빨강, 보라, 노랑, 주황 빛깔들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
가져간 작은 바구니에 상추와 고추, 가지를 따서 부엌으로 돌아왔다. 가지는 찜솥에 쪄서 마늘과 고추를 다져 넣고 깨 톡톡 뿌려서 무쳤다. 다시 장독대로 가서 된장을 퍼와 찌개를 끓이고, 상추쌈과 풋고추를 위해 쌈장도 만들었다. 이렇게 집으로 놀러 온 친구에게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집밥 한 상을 차려낸다. 내가 직접 발효시킨 막걸리도 같이 밥상에 올린다. 친구는 “좋네, 맛있네” 소리를 연신 해대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다.
보통 때 나는 텃밭 일과 정원일, 자잘한 집안일 끝내고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는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와 글을 쓴다. 나의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재미있고 행복한 이야기들을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쓰는 것이다.
하늘이 할아버지의 귀촌 이야기를 들은 후 막연하던 전원생활에 대한 꿈이 구체적인 계획으로 나타났다. 지금부터 은퇴를 하기까지 딱 6년이 남았다. 6년 후엔 딸아이를 독립시키고, 서울을 벗어난 근교에 아담한 시골집을 하나 마련할 것이다. 다행히 남편은 손재주가 좋다. 집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는 장난감이 주어진 것처럼 늘 어딘가를 수리하며 행복해할 것이다. 물론 겉으로 투덜이처럼 투덜거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