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카페 가는 길

-나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면

by 은효

북한산 아래 나지막이 들어선, 요즘은 보기 힘든 5층 짜리 아파트. 내가 사는 103동의 공동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 벚꽃나무들이 파아란 하늘과 맞닿아 줄지어 늘어서 있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며 봄기운을 느껴본다.


‘다행히 미세먼지도 나쁘지 않군. 걸을 만하겠는데’

고무줄 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한겨울 빼고 늘 쓰고 다니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썼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자 스쿠터가 한대 지나쳤다. 자세히 보니 106동에 사는 모모의 남편 낙타가 아들 인우를 태우고 있었다.

“어디 다녀와요?”

“마트요” 낙타가 속도를 줄이며 답했다.

“모모는요? ”

“집에 있어요”


그들을 지나쳐 다시 걷는다. 106동에는 헌과 찬 두 아들의 엄마 쪼코도 살고 있다. 그녀와 나는 독서모임을 같이 하고 있다. 며칠 전 까만 비닐봉지를 무겁게 들고 오는 그녀를 아파트 어귀에서 만났다.

“사과를 아주 싸게 샀어. 두어 개 줄까?”

“괜찮아~ 얼마 전에 산 게 아직 집에 좀 있어”

우린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웃사촌으로 살고 있다.


와인을 좋아하는 모모, 맥주를 좋아하는 쪼코, 막걸리를 좋아하는 나. 금요일 저녁 가끔씩 서로의 집에서 소소한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아파트를 나서서 골목길로 접어들면 토마토부동산 간판이 보인다. 수민엄마 토마토의 부동산 사무실. 그녀의 사무실은 마치 카페 같다. 천장의 조명도, 벽에 걸린 사진도, 길쭉한 우드테이블도, 의자도 소파도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엣지 있다. 마침 손님이 없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토마토가 반갑게 맞이한다. 따뜻한 차 한 잔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아서, 사지도 않을 거면서 괜찮은 부동산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우리의 동갑내기 딸들의 최근 정보도 나눈다. 운영이 잘되냐는 내 물음에 늘 힘들다고 하지만 개업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무실이 반짝이고 있는 걸 보면 그녀는 능력 있는 공인중개사임에 틀림없다.


토마토부동산을 나와, 아이들이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하는 편의점을 지나면 소나무 군락지인 솔밭공원이 나온다. 이 아담한 공원을 지날 때는 많은 동네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제일 자주 만나는 사람은 디노다. 내가 잘 못 보고 그냥 지나치면 언제나 디노가 먼저 “진달래~”하고 살며시 불러준다. 디노와 풍경 부부는 나의 텃밭지기이다. 솔밭을 지나 둘레길을 30분 정도 걸으면 구청에서 운영하는 마을텃밭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텃밭을 한 고랑씩 분양받아서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주말 아침 나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고 있으면, 그들 부부는 항상 함께 와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일을 한다. 디노와 풍경은 언제나 그렇게 고요해 보인다.


얼마 전엔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호수와 산 부부를 보았다. 해도 덜 진 초저녁,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은 공원에서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그들을 보고 잘못 본 것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았다. 그냥 지나치려다 아는 척을 하니,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를 속으로 삼키며, 눈 지그시 내려감과 가던 길을 재촉했었다.


솔밭공원을 벗어나면 단독주택과 이삼 층 정도의 빌라들 사이로 제법 큰길이 나 있다. 자동차와 사람이 같이 다녀서 조심해야 한다. 건물들의 높이가 낮아서 고개를 들면 북한산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자동차만 안 다니면 금상첨화인데 하며, 하늘도 한번 올려다보고, 담장 너머로 흘러내린 능소화와 장미넝쿨도 구경하며 걷는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재미난학교 교사였던 수리가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가 더러 있다. 요가와 명상을 좋아하는 그녀는 걸을 때도 포행을 하는 듯 언제나 천천히 바른 자세로 한보한보 내딛는다. 그래서 아는 척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준다.


걷다 보니 어느새 동녘의 언니 아침이 운영하는 치킨집 앞이다. 오늘은 누가 단 두 개뿐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나 고개를 디밀어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미소와 호린, 동녘이 치킨을 앞에 두고 하얀 거품 가득한 생맥주 잔을 기울이고 있다. 문을 살짝 열고 인사를 하니, 한 잔 하고 가라고 야단이다. 난 얼마 전 단식을 했고 지금은 보식기간이라 술도 고기도, 떡도 빵도 먹을 수 없다고 하니, 그녀들은 왜 그런 피곤한 걸 했냐며 짓궂게 나무란다. 나는 들은 척 만 척 아주 좋으니 한번 해보라며 권하는데, 서로가 각자의 이야기만 해댄다. 그러다 한바탕 웃고 나중에 다시 보자며 고소한 치킨 냄새를 뒤로 하고 나온다.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면 오늘 나의 목적지 재미난 카페가 나온다.

마을공유공간 재미난 카페에는 책읽기모임, 독서토론모임, 와인모임, 저녁밥모임도 있고, 바느질 모임, 뜨개질 모임 등 여러 가지 모임이 있다. 있다가 사라지는 모임도 있고, 또 새로운 모임이 생겨나기도 한다. 강사를 초빙해서 마을강좌를 열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이 오가며 소통하는 곳이며, 솜씨 좋은 사람들이 만든 수제품의 거래나 공동구매가 이루어지는 마을 장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쓸모가 다한 서로의 살림살이를 나눔 하며 비우고, 또 나눔 받아 채우는 곳이다.


나는 여기서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아침 8시에 아이들 같은 반 엄마들과 독서토론 모임을 한다. 오늘은 영화를 보러 왔다. 한 달에 한 번씩 용사와 칸타가 여는 ‘영마살’이라는 영화모임. 영화마을살이의 줄임말.


오늘은 김재환 감독의 다큐영화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 - 칠곡 가시나들]을 볼 예정이다. 칠곡에 사는 여든이 넘은 일곱 명의 까막눈 할머니들이 글을 배워서 시를 써가는 내용이라고 한다. 칠곡이 고향인 눈꽃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다. 나도 그 옆에 조용히 앉는다.



그날 본 영화 속 칠곡 할머니들의 투박한 사투리 속에 숨겨진 여린 소녀같은 모습과 거친 삶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시들은 잔잔한 감동으로 아직까지 내 가슴에 남아있다. 30년쯤 후 나도 우리 재미난 마을 친구들과 함께 감동 한 스푼 녹아든 영화 한 편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재미난 마을은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삼각산재미난 학교의 학부모, 교사, 졸업생, 졸업부모들 그리고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기를 원하는 그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공동체이다. 이 속에 들어오면 실명이 아니라 별칭을 지어서 쓴다. 별칭을 부르는 것은 과거의 나를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의미, 마을구성원 상호 간 나이, 성별, 사회적 직위에 상관없는 평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낙타, 모모, 쪼코, 토마토, 디노, 풍경, 산, 호수, 수리, 동녘, 아침, 미소, 호린, 용사, 칸타, 눈꽃은 모두 재미난 마을에서 함께 웃고, 때론 함께 울며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나의 마을지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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