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뎌라! 버텨라! 불타는 사막과의 한 판 승부
전날 밤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아침이다. 매일매일이 그렇지만 유난히 더 그렇다. 어젯밤은 술 없이도 완전히 취해 있었다. 별이 가득히 박혀 반짝이는 어둑어둑해진 사막 아래, 푸르공을 타고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남들이 보기에는 고성방가고, 우리에게는 낭만인...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무한 반복 재생하며 게르에 돌아와서는 지치지도 않고 보드카를 열어젖히고 고비사막과의 한판 승부를 되새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다. 아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일어나자마자, 낮은 게르 문에 머리를 쿵-하고 박은 것을 보니.
오늘도 우리는 떠난다. 바로- 바양작으로! 이곳은, 첫날 들렀던 차강 소브라가처럼 몽골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린다. 이 두 곳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생김새는 비슷하다만 바양작은 차강소브라가보다 규모도 크고 더위도 더 대단하다. 트래킹 코스도 차강소브라가에 비해 훨씬 힘들다.
그러나 전날 고비사막 등반을 마치고 나니 무서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과 고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쓸데없는, 기우와도 같은, 별 같잖은 걱정들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이 몸소 느껴진다. "힘들어봤자, 고비사막 만하겠어?" 아- 어쩌면 인생의 모토가 바뀔 것만 같다.
어찌 되었건, 비슷해 보이는 이 두 곳이 유난히 유명해지게 된 것은 바로 석양 때문이다. 해가 저물 때 불타듯이 붉게 반짝거리는 모래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또 시내 가이드는, 바양작은 공룡 화석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고도 설명을 덧붙였다. 특히, 세계 최초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어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도 한다.
바양작의 '바양'은 몽골어로 풍부한 이라는 뜻이고, '작'은 고비사막의 대표적인 자생종이자 중앙아시아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삭사울 나무를 의미한다. 삭사울 나무가 풍부한 곳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급속한 지구 온난화 및 사막화로 나무가 자라기 점점 힘든 환경이 되고 있어 정작 나무는 보기가 힘들었다.
푸르공에 실려 덜컹거리는 느낌도- 우리의 여행 동지와 가이드도- 밥도 모두 적응이 될 만한 5일 차 아침,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아니! 외려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것 같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더위. 더위. 더위다!
제발- 살려줘- 왜 어제보다 더 더운 것 같은 거지? 선글라스를 껴도, 쿨링 소재의 옷을 입어도 피할 수가 없다. 사막의 위엄은 대단했다. 사막 생활 이틀차- 우리의 더위 관찰 일지를 잠시 공유하고자 한다.
첫째, 보습용으로 샀던 에센스바와 선스틱이 녹아 액체가 되었다. 뚜껑을 열었더니 주르륵하고 흘러나온다. 그래, 네 녀석들도 견디기 힘들었겠지.
둘째, 급격히 줄어든 말수- 일단 차에 타면 다들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너무 더워 딱히 잠도 오지 않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에너지를 보존한다. 말을 많이 하면 머리가 딩딩 울려대니 생존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셋째, 피부. 피부가 타다 못해 살려달라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손톱 밑에는 거스러미가 생겨 쩍쩍 갈라져 피가 나기 시작했다. 핸드크림으로는 수습이 안되어, 얼굴에 바르려던 에센스 바를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떡칠을 했다. 손은 양반이다. 얼굴 피부가 따가워 만져보니 얇은 껍데기가 밀려 나온다. 오. 마이. 갓.
그나마, 이 정도인 게 다행인 건가? 그래도 나도 일행들도 코피가 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이것저것 여행 후기를 읽어보니 공기가 너무 건조해 갑자기 코피가 터지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어쨌든, 마지막 부작용은 정말 내 인생에 절대로 없던 일인데 말이다- '입맛이... 없다!' 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자칭 밥 귀신- 장군님인 내가! 식도락 여행의 가치에 대해 100페이지짜리 논문을 쓰고도 남을 내가! 점심으로 나온 몽골식 명절 찐만두를 입에도 못 댔다.
배가 안고프다. 아니, 배는 고픈데 한 입 베어무니 입안이 까슬까슬하고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하- 이러한 이유들로 한국의 실내기온 18도짜리 에어컨이 미친 듯이 절실해지는 지금이다만, 이제는 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끔찍하게 견디기 힘든 더위조차도 다 그리운 추억이 되리라는 것을-
버텨라! 버티는 자가 살아남을 것이니...
바양작의 검붉은 모래 절벽만큼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낙타 인형! 몽골의 욜링암이나 울란바토르 등 다른 관광지에서도 낙타 인형을 살 수 있지만, 다양한 디자인의 낙타 인형을 볼 수 있고 품질도 가장 훌륭하다 알려져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봉제 인형이 아닌, 진짜 현지인이 낙타털로 만든 수제 낙타 인형이 유명한데, 핸드 메이드에 관광지다 보니 몽골 현지 물가에 비하면 가격이 싸지는 않다.
바양작으로 이동 중에 낙타 인형을 파는 상점에 내렸다. 우리는 색색깔의 낙타 인형을 보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념품은 잘 사는 편이 아니지만, 시내 가이드의 "진짜 낙타털로 만든 인형은 여기서만 살 수 있다."는 말에 홀려 미니 낙타 자석을 하나 샀다.
이게 진짜 낙타털이라고? 신기하다. 촉감이 까끌까끌 한 것이 마치 부직포 같다.
시내도 우리처럼 한참 동안 물건을 바라보더니, 딸의 생일 선물로 예쁜 팔찌를 하나 샀다.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들은 생각보다 앳되었다. 많이 쳐줘봐야 고등학생 즈음 되었을까? 상점의 천막 안에는 4~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볼이 발그레해질 때까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막대사탕을 한 두 개씩 쥐어주니, 볼 한가득 사탕을 물고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무장해제시킨다.
본격적인 바양작의 관광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어제의 고난이 너무 컸던 탓일까- 경치는 아름답고, 트래킹 코스도 딱 좋았다. 다들 체력이 고새 늘었다. 시내는 컨디션이 한층 좋아진 우리를 보며 행복해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 스폿을 5분에 1번씩 알려주며 직접 사진도 찍어줬는데, 정말 '인생샷'이 잔뜩 나왔다.
햇빛은 쨍하고, 절벽 색감도 완벽했다. 만약 sns를 했었다면 아마 업로드를 하루에 2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오늘의 저녁식사는 김치찌개. 역시 시내는 최고의 가이드다. 우리가 슬슬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챈 걸까? 타국에서 먹는 한식은 언제나 남다르다. 생각해 보니, 공항에서의 마지막 식사도 김치찌개였다. 이상하게 인천 공항은 김치찌개가 유독 맛있다.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김치찌개며, 비빔밥이며 한상 시켜놓고 먹던 게, 겨우 5일 전인데 마치 5주는 지난 것만 같다.
한 솥 가득 담긴 김치찌개 냄비를 들고, 게르에서 탈출했다. 창문 없는 게르는 너무 더워서 도저히 뭘 먹을 수 없었기에 야외 식사를 감행했다. 건물 뒤 작은 그늘에 테이블을 깔아놓고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감성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지만,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꽤 즐겁다. 간간히 아주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도 행복해지고, 매번 먹던 김치찌개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매콤함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캠핑을 이래서 하는구나!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는데 어스름하게 어두워진 하늘의 박힌 별을 보며 보드게임을 즐겼다.
핸드폰을 안 보고 보드게임을 즐기다니. 데이터 광신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핸드폰을 하고 싶었지만 사실 데이터를 아껴야 하기도 했다. 분명 게르 안에서는 전기가 항시 사용 가능하다고 들었었는데, 하루에 2시간만 된다. 그것도 각 게르에서 되는 게 아니고 공용 식당에서만 된다.
콘센트는 달랑 2개. 멀티탭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6구짜리 멀티탭에 주렁주렁 핸드폰과 보조배터리를 달아놓으니 모양새가 우스웠다. 전기를 발명한 게 누구였더라...? 몽골에 오면 아날로그로의 회귀가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다. 디지털이 그립다. 미치도록.
그 와중에 내 보조배터리는 더위를 먹었는지 안되기 시작한다. 제기랄. 이제 어쩌지? 디지털 디톡스? 개나 주라 그래라. 스티브잡스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