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증 자녀 보호자가 국가에 보낸 편지
(오늘 글은 내담자분의 동의 하에 작성했습니다)
"저는 아이와 같이 죽고싶지 않아요"
이 말을 하신 분은 스무 살이 된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처음부터 이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자라다가 희귀 질환으로 인해 서서히 모든 기능을 잃어갔습니다. 시각이 사라지고, 청각이 사라지고, 의식이 흐려지고, 스스로 숨을 쉬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인공호흡기가 아이의 폐를 대신합니다. 낮에는 3분마다, 밤에는 30분마다 가래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어머니의 하루입니다. 20년째.
그분은 이렇게도 얘기했습니다.
"왜 최중증 아이를 돌보는 부모들이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글을 읽는 당신도 알 겁니다.
아이가 성인이 된 날
올해, 아들이 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날은 축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날부터 활동지원 시간이 줄었습니다. 335시간에서 210시간으로. 120시간이 사라졌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인이 되었으니까. 한부모 가정이 아니니까. 학생이 아니니까. 그리고, 아이가 사회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3분마다 기계가 숨을 불어넣어야 살 수 있는 아이에게, 제도는 사회활동을 요구했습니다.
그즈음, 어머니는 또 다른 일을 겪었습니다. 성인이 된 아들의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담당자는 말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규정상 안 된다고.
어머니는 물었습니다. 방법이 없냐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방법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들의 눈꺼풀에 테이프를 붙여 억지로 눈을 뜨게 한 뒤,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실, 눈을 감은 채 찍으면 어떻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 나라의 제도가 이 아이의 존재를 처음부터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연기해야 했다는 것을.
바늘구멍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활동보조 시간을 더 받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보호자가 일을 하거나. 보호자가 65세 이상이거나. 아이가 세대분리를 해서 혼자 살거나.
이 어머니는 20년간의 간병으로 심장수술을 받았습니다. 당뇨, 고지혈증, 공황장애, 우울증. 나라가 인정한 근로무능력자입니다. 낮에 활동보조인이 와 있어도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아들에게 언제 응급상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65세가 되면 시간을 더 준다고 합니다. 아직 그 나이가 아니라서 안 된다고 합니다.
아들을 세대분리시키면 시간을 더 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묻습니다.
"세대 분리한다고 제가 아이를 안 돌보겠냐고요"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어머니 주변의 최중증 가정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활동지원 시간을 겨우 받아도, 그 시간을 쓸 수가 없습니다. 인공호흡기와 석션기가 달린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활동보조인을 구하지 못해서입니다. 지원이 있어도 닿지 않는 것, 이것이 또 다른 벽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은 알아볼 힘이 없습니다.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 어느 순간 더 이상 묻지 않게 됩니다. 그냥 포기하게 됩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인데, 제도의 벽 앞에서 한 번 더 무너지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 고통의 진짜 이름
심리학자 올샨스키(Olshansky, 1962)는 이 슬픔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만성적 비탄'이라고요.
보통의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수용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의 슬픔은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가 처음 눈을 감던 날, 처음 혼자 숨을 쉬지 못하게 되던 날, 또래 아이들이 졸업식을 하는 날, 성인이 되어도 기저귀를 채워야 하는 날, 상상했던 아이의 삶을 계속해서 잃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슬픔은 수용되지 않고, 파도처럼 반복해서 밀려옵니다. 이분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이 슬픔의 본래 구조입니다.
서울대학교병원 어린이완화의료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최중증 장애아를 돌보는 부모는 하루 14시간 넘게 돌보고, 5시간 남짓 잡니다. 그마저도 연속으로 잘 수 없습니다. 기계 알람 소리에, 가래 끓는 소리에 조건반사적으로 깨어납니다. 이 모든 것을 끝낸 뒤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하루 평균 두 시간 남짓입니다.
장애학 연구자들은 이 상황을 '구조적 배제'라고 부릅니다. 지원이 존재하는데 접근할 수 없는 상태. 처음부터 이 가정을 위해 설계되지 않은 제도. 그리고 심리학자 스미스와 프레이드(Smith & Freyd, 2014)는 이것을 '제도적 배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관이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 국가가 돌봄의 조건을 불가능하게 설계해 놓고, 그 안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노력이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것.
연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가능한 조건들 앞에 세워진 사람은, 결국 제도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내면화하게 된다고. 어머니들이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며 스스로를 탓할 때, 그 자책의 화살은 잘못된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가 무너지는 것은, 감당할 수 없도록 설계된 조건들 때문입니다.
숨쉴 틈 하나면 됩니다
이 어머니를 돕고 싶었던 건 저만이 아닙니다. 현장의 공무원도, 사회복지사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제도의 벽 사이에서, 그분들도 무력했다고.
글을 쓰는 지금도 어머니가 느꼈을 무력함이 전달됩니다. 제도를 바꿀 힘이 저에게 없고, 이 어머니의 3분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요구하는 것은 크지 않습니다.
벽을 허물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도 전체를 바꿔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청서에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근로무능력자로 판정받은 자' 이것 하나만 넣어주시면 됩니다"라고요.
그리고 공론화 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숨쉴수있는 작은 구멍을 만들어주세요."
65세가 되지 않아도, 일을 하지 않아도, 아이를 혼자 두지 않아도, 이 가정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틈. 그것이 이 어머니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저는 이 글이, 지금 이 순간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모든 어머니들이 숨 쉴 수 있는 틈을 만드는 데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 주변에도 혼자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나요.
그 사람이 떠오른다면, 이 글을 살며시 건네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만큼은, 그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불러주세요. 숨 쉴 틈은 그렇게도 생기니까요.
힐링인사이트 노수정이었습니다:)
[참고문헌]
Olshansky, S. (1962). Chronic sorrow: A response to having a mentally defective child. Social Casework, 43(4), 190–193.
Boss, P. (1999). Ambiguous loss: Learning to live with unresolved grief. Harvard University Press.
Smith, C. P., & Freyd, J. J. (2014). Institutional betrayal. American Psychologist, 69(6), 575–587.
Menjívar, C. (2021). The racialization of "illegality." Daedalus, 150(2), 91–105.
서울대학교병원 어린이완화의료센터 (2022). 중증 소아환자 가정 돌봄 실태 조사.
최복천 외 (2020).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24시간 수급자 실태 분석. 한국장애인개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