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처음 온벼리 작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댓글을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분이라는 것을. 출간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주저함 없이 책을 주문했고, 친정에 내려가는 작은 가방에 챙겨 넣었습니다.
여름, 책을 펼치던 밤
모두가 잠든 밤에 책을 펼쳤습니다.
조금 보다 자야지, 했는데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였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책 이곳저곳 다시 펴보며 읽기를 몇 번, 작가님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이 책은 익숙한 카페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오랜 지인을 만나는 것 같이 편안했습니다. 창가에 앉아 비 오는 거리를 내다보며, 조용히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는 목소리처럼. 덤덤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책에는 작가님이 자라온 환경, 엄마와의 관계,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스무 해의 시간이 계절의 흐름 위에 펼쳐집니다. 여름에서 시작해 긴긴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오기까지. 모든 계절을 지나며 아이를 키운 이십 년이 담겨 있었습니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삶이었지만, 동시에 모든 엄마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내 삶이기도 했고, 상담 장면에서 만나왔던 어머니들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님이 스스로 정의하는 다정한 어른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그 문장들을 읽으며 자꾸 같은 질문이 떠올랐어요. 나는 지금 충분히 다정한 어른이 되었나.
인생은 만날 봄일 수 없다. 때로는 무너지고, 때로는 방향을 잃고 헤매다 좌절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붙든다. 혹독한 세월을 견디기 위해 가슴에 작은 희망의 씨앗을 품고 산다. 그래야 다시 살아내고, 다시 피어날 용기를 얻는다.
가을, 놀이터에서
얼마 전 일입니다. 첫째 아이가 놀이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잡기놀이를 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머리부터 나무 모서리에 부딪히며 떨어졌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어요. 한달음에 달려가 아이 머리를 쓰다듬는데 양손에 피가 묻었고, 놀이터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구급차를 부르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아이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엄마, 나 이제 죽는 거야?" 겉으로는 차분한 척 애썼지만 속에서는 심장이 벌렁거렸습니다. 두피 상처를 스테이플러로 처치한 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집에 오는 길, 모든 기력이 소진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단 한 번으로도 그 밤을 뜬눈으로 보냈는데, 작가님 가정에서는 그런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 채 매일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작가님이 이렇게 씁니다.
우리는 모두 힘겨움을 붙들고 살아간다. 무게만 다를 뿐 모든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수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아무리 남의 아픔이 커도 자신의 아픔만큼 클 수는 없는 법이다.
특별한 상황의 말 같지만, 읽고 나면 누구나 자기 이야기처럼 느낍니다. 작가님은 이 말을 가르치듯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옆에 앉아서, 알고 있다는 듯이 덤덤하게 건넸어요. 애쓰지 말라고. 이 순간을 견디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긴긴 겨울을 버텨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겠지요.
겨울, 가시밭 위의 잠
아이가 태어나 뇌수막염을 앓는 장면에서는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의사의 말을 전하는 문장에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고 작가님은 씁니다. 뇌전증이 시작된 해였습니다. 아이가 발작을 시작한 이후 십 년이 넘도록, 매 시간 가시밭 위에서 잠을 청했다고.
상담 장면에서 어머니들을 만나다 보면, 어떻게든 버텨온 분들이 이 지점에서 무너지는 경우를 봅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자신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것이지요.
작가님은 힘들어도 누군가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아이도 살 수 있었다고. 그 말속에 얼마나 많은 밤이 들어 있는지, 읽는 사람은 압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상담에서 만났던 어머니들의 얼굴이 한 분 한 분 떠올랐습니다. 작가님 한 분의 삶이었지만, 그 안에 수많은 삶이 함께 있었습니다.
봄, 새봄이라는 이름처럼
겨울을 읽는 내내 다가올 봄이 기다려졌습니다.
아이의 이름이 새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작가님의 가족에게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어요.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먼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고.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모든 걸음의 시작이라고.
저 역시 상담을 하며 오래 생각해 온 것과 같은 자리에 있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마음이라는 공간에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죠. 누가 갑자기 물을 끼얹어도 넘치지 않는 그릇, 그것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가꾸는 일이 자기돌봄입니다.
다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그릇을 평생 조금씩 다듬어가는 일인지 모릅니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손질하는 것.
이 책은 느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께 건네고 싶습니다. 정보가 아닌 온기가 필요한 순간에, 선배 어머니의 목소리로 옆에 앉아줄 책입니다. 상담자가 채울 수 없는 자리를, 이 책이 채워줄 거라 생각합니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그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의 사정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읽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거친 말과 서툰 분노만 보던 자리에서, 그 아래 감춰진 두려움과 책임감까지 함께 보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게도 향했다. 그날의 나는 타인의 떨리는 손을 안쓰러워하면서도, 정작 내 지친 마음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이제는 안다. 삶의 거친 순간들을 지나오려면, 누구를 이해하는 마음만큼이나 나 자신에게도 다정해야 한다는 것을. 나를 몰아붙이는 대신 '그때도 최선을 다해 견디고 있었구나' 하고 말해주는 마음, 어쩌면 그 마음이야말로 내가 되어가고 싶은 어른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나요.
힐링인사이트 노수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