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만 들리는 목소리

4월 2일 세상이 자폐를 인식하는 날, 엄마는


"어쩔 때는 꿈도 꿔요. 애가 말을 좀 하는 꿈을 꾸면은 딱 일어나면은 속상해요."


연구에서 만난 G님은 그 말을 꺼내놓고 잠시 말을 잃으셨습니다. 속상하다는 표현이 너무 작게 느껴졌습니다. 꿈속에서만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는 그 목소리. 저는 한동안 그 장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매년 4월 2일이 돌아옵니다. 세계 자폐인의 날. 도시 곳곳이 파란 불빛으로 물들고, 뉴스는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이해를 높이자는 캠페인을 전합니다. 세상은 매년 조금씩 더 자폐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파란 불빛 앞에서 자꾸 G님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의 네비게이션이 업데이트되는 날


"배가 고프다고도 말 못하고 똥이 마렵다고도 말 못하고... 그걸 감으로 아는데 나중에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되나."


I님은 매일 아이의 신체 신호를 직접 읽습니다. 배가 고픈지, 화가 난 건지, 졸린 건지. 말로 오지 않는 좌표를 엄마의 몸이 먼저 받아냅니다. GPS 신호가 잡히지 않으니, 엄마가 위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네비게이션은 매년 업데이트됩니다. 자폐에 관한 데이터가 쌓이고, 정보가 정교해집니다. 그런데 I님이 매일 찾는 경로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의 배고픔. 아이의 지금 감정. 이 아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그 좌표를 아무리 입력해도 화면은 한 줄만 돌려줍니다.


경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Cambridge 대학의 Crompton과 동료들(2020)이 한 실험을 했습니다. 자폐인끼리, 비자폐인끼리, 그리고 둘이 섞인 집단에서 각각 소통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지를 측정한 것입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자폐인끼리의 소통은 비자폐인끼리만큼 정확하고 유연했습니다. 오류는 두 세계가 섞일 때 생겼습니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소통의 어려움은 자폐인의 결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좌표계를 가진 두 세계가 만날 때 생기는 마찰이라고. 처음부터 다른 좌표계로 설계된 길은, 세상의 네비게이션으로는 찾아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길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I님이 "감으로 안다"고 하신 그것은 무엇일까요.


Kruithof와 동료들(2024)은 이것을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라고 부릅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표준화할 수도 없지만, 실제 돌봄의 현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지식. 전문가가 "감각 과부하가 일어나면 소음을 줄이라"고 말할 때, 어머니는 다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소리에 먼저 굳어지는지. 손끝이 어떻게 떨릴 때 안아주어야 하는지. 그 순간 어떤 목소리로 말을 걸어야 하는지. 몸이 기억하는 것들입니다.


이 지식은 교과서에 없습니다. 네비게이션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아이의 신호를 읽어온 몸 안에는 있습니다.


상담을 공부하고 많은 어머니들을 만나오며 제가 느낀 건 하나입니다. 아이 삶의 진짜 전문가는, 바로 어머니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론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 아이의 좌표를 읽는 법은 당신만 알고 있습니다.


엄마의 몸이 아는 것

I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엘리베이터 탔을 때도 누가 오는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열린 버튼을 눌러서 다른 사람을 기다려준다든가... 초등학교 때 OO이는 아니구나."


네비게이션이 찾지 못한 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낸 길.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길.

G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려놓긴 내려놨다고. 더 이상 빨리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도 말 좀 했으면 좋겠다고. 그 두 마음을 동시에 안고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내려놓는 것과 여전히 바라는 것.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안고 있는 사람만이, 꿈에서 들린 목소리를 하루의 슬픔으로 삼고도 다시 아침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Healing Insight


오늘 4월 2일, 세상은 자폐를 인식하자는 날로 기억합니다.

당신이 감으로 알아온 것들. 그 감각이 오늘 하루만큼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어줄 수 있을까요?


세상이 만든 네비게이션에는 이 아이의 경로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몸이 수년을 들여 만들어낸 또 다른 네비게이션에는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입니다.

꿈에서 들렸던 아이의 목소리. G님은 그 목소리를 안고 다시 아이의 신호를 읽기 시작했을 겁니다.


오늘 하루, 이 글이 당신에게 잠깐의 쉼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같은 길을 홀로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글의 이유가 됩니다.


세상이 자폐를 기억하는 날은 하루이지만,

당신이 아이를 이해하는 데는 매일이 필요했습니다.



힐링인사이트 노수정이었습니다 :)



[참고문헌]

Crompton, C. J., Ropar, D., Evans-Williams, C. V. M., Flynn, E. G., & Fletcher-Watson, S. (2020). Autistic peer-to-peer information transfer is highly effective. Autism, 24(7), 1704–1712. https://doi.org/10.1177/1362361320919286

Kruithof, K., Hoogsteyns, M., Zaal-Schuller, I., Huisman, S., Willems, D., & Nieuwenhuijse, A. (2024). Parents' tacit knowledge of their child with profound intellectual and multiple disabilities: A qualitative study. Journal of Intellectual & Developmental Dis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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