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집에 살면서도 왜 우리는 다른 아이를 보고 있었을까
문제는 아빠부터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덩치만 큰 아기니까 저는 정말 사랑스럽고 예쁜데, 문제는 아빠부터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제 연구에 참여하셨던 C님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외로움이 더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이를 향한 마음은 충만한데, 그 마음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나눌 수 없다는 것.
F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빠랑 엄마랑의 입장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아빠가 사회적인 일을 많이 하다 보니까 가정에 대한 세세한 부분을 잘 모르잖아요. 아빠는 그런 부분이 부족하지 않나 이런 거에서 상호적인 갈등이 좀 있어요."
'상호적인 갈등'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갈등의 무게는 절대 상호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G님은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아이에게 그토록 쏟아부었는데도 아이가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남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 그 온도 차이가 결국 부부싸움으로 번졌다고 하셨습니다.
B님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습니다. 남편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분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이가 감당이 안 되는 순간, 남편은 몸으로 제압했습니다. 그게 맞다고 믿었습니다. B님은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며 숨을 죽였습니다. 아이가 걱정되었지만, 끼어들면 싸움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 침묵이 B님에게는 어쩌면 싸움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을 겁니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두 사람이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마다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았다고 하셨습니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아이를 보고 있는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엄마는 통역사입니다
처음부터 다 안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왜 우는지 몰라서 틀렸고, 왜 갑자기 멈추는지 몰라서 또 틀렸습니다. 배고프면 냉장고 앞에서 서성거리다 그릇장을 열어 그릇을 쏟아내는 아이. 그것이 '배고프다'는 신호라는 것을 알기까지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천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아이의 어깨가 살짝 올라가는 것만 봐도 압니다. 오늘 불안하다는 것을. 지금 뭘 원하는지를.
어머니의 지식은 책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수천 번 틀리면서 몸에 새겨진 감각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단번에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 만든 전문성입니다.
발달장애 자녀는 세상과 소통할 때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개별적 의사소통'이라고 하지요. 남들에게는 의미 없는 소음이나 몸짓처럼 보여도, 어머니라는 유일한 통역사에게는 "지금 너무 불안해요" 혹은 "나 좀 봐주세요"라는 선명한 문장으로 들리는 언어입니다.
"이 아이들은 그럴 경우에는 몸을 더 안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아이가 불안한 거예요. 마음이 아이라 그래요."
C님은 아이가 돌발행동을 할 때 이렇게 합니다. 행동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안쪽의 불안을 먼저 읽는 것. 그것이 수천 시간이 만들어낸 통역사의 눈입니다.
남편이 "아이가 갑자기 왜 저러지?"라고 물을 때, 어머니는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아이의 마음을 번역하고 있는 겁니다. 그 번역이 '과보호'라는 말로 돌아올 때, 어머니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닙니다. 아마도 수천 번의 시행착오로 쌓아올린 자신의 전문성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일 겁니다.
Kersh와 동료들의 연구(2006)는 이 격차를 숫자로 보여줍니다. 자녀의 상태가 어려워질수록 어머니의 부부 만족도는 직접적으로 하락했지만, 아버지의 만족도에는 유의미한 영향이 없었습니다. 같은 집, 같은 아이인데도.
이것은 아버지가 무심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언어를 익힐 시간이 달랐던 겁니다. 어머니는 수천 시간을 그 언어 안에 있었고, 아버지는 퇴근 후 잠깐 그 언어 앞에 섰습니다.
Kreiser와 Segal의 연구(2025)는 한 가지 역설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치료 현장에 발을 들이고 아이를 더 많이 알아갈수록, 정작 아버지 자신의 심리적 부담은 줄어들었습니다.
더 알수록 덜 무거워지는 것.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있는 상태가, 오히려 아버지를 아이로부터 더 멀리 세워두고 있었던 셈입니다. 악의가 아니라, 낯섦이었습니다.
통역을 믿어준다는 것
Okimoto와 동료들의 연구(2021)는 어머니의 외로움을 막는 가장 강력한 변수가 배우자의 정서적 지지였다고 말합니다. 설거지를 돕는 것보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판단을 한 번 믿어주는 것이 결정적이었다고요.
G님과 H님은 인터뷰에서 나란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빠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케어하는지, 그런 거 좀 배웠으면 좋겠어요."
비난이 아니었습니다. 포기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아직 이 언어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남편분이 읽고 계신다면
저는 이 연구를 진행하며 아홉 명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상담실에도, 연구 현장에도, 늘 어머니만 오셨습니다. 남편들은 그 시간에 일터에 있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빠듯한 하루였을 겁니다. 그것이 이 연구의 한계이기도 하고,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Dunn과 동료들의 연구(2021)에 따르면, 아버지들은 사실 자녀를 위해 뭔가 하고 싶어합니다. 단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때 무력감을 느끼고 물러서는 것입니다.
"내 말은 안 듣는데 아빠 말은 들어요"라는 A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이에게 닿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물러서 있는 동안, 아내는 혼자 통역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아마 더 많은 도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내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 그 마음 하나가 긴 하루를 버텨온 통역사에게 건네는 첫 번째 악수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이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남편에게 조용히 건네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에게도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통역은 누가 알아주었나요?
힐링인사이트 노수정이었습니다 :)
[참고문헌]
Dunn, K., Langley, E., & Totsika, V. (2021). The 'hats' of fathers of adults with intellectual and developmental disabilities. Journal of Applied Research in Intellectual Disabilities, 34(6), 1548–1558.
Kersh, J., Hedvat, T. T., Hauser-Cram, P., & Warfield, M. E. (2006). The contribution of marital quality to the well-being of parents of children with developmental disabilities. Journal of Intellectual Disability Research, 50(12), 883–893.
Kreiser, N., & Segal, O. (2025). The power of two: Exploring the impact of mothers' and fathers' involvement in speech-language pathology treatment for children with autism. International Journal of Language & Communication Disorders.
Okimoto, H., et al. (2021). Factors associated with loneliness in mothers of children less than 3 years of age. BMJ Open,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