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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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지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의 시선 앞에서 마트가 지워지고, 식당이 지워지고, 교회가 지워지던 이야기. 한때 넓었던 지도가 점점 좁아지다가 결국 집만 남던 이야기.


그 글을 쓰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워진 지도가 있다면, 처음부터 받지 못한 지도도 있다고.

연구에서 만난 한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저희 세대는 성교육을 배우질 않았어요. 남자애다 보니까 이렇게 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가 참 민망한 거예요."



받은 적 없는 지도




또 다른 어머니의 아들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인지적으로는 아직 어린아이에 가까웠지만, 몸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온몸으로 기뻐하던 아이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아직 몰랐습니다. 쫓아다니거나, 툭 건드리거나. 그게 그 아이가 아는 유일한 마음의 언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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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문제 행동이니 집에서 조절해달라고요.


어머니는 아이의 마음을 먼저 인정해 주려 했습니다. 순수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표현하면 상대방이 당황할 수 있다고, 속으로만 좋아하고 마음만 간직하자고.


또 다른 어머니의 아들은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었습니다. 몸은 그랬지만, 마음은 아직 3~4살에 가까웠습니다. 신기하거나 관심이 생기면 손이 먼저 뻗어나갔고, 가려우면 그 자리에서 바지를 내렸습니다. 악의가 없다는 것을 어머니는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몸을 먼저 봤습니다. 무서워했습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이것은 두 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상담에서, 그리고 연구에서 만난 어머니들이 같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배운 적이 없으니 가르칠 수가 없고, 가르치려 하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세대 간 침묵이라고 부릅니다. 말이 끊긴 자리에 침묵이 쌓이고, 그 침묵이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Punjani와 동료들의 연구(2025)는 전 세계 부모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의 장벽을 분석하면서, 이 침묵이 단순한 정보의 부족이 아님을 밝혀냈습니다. 부모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정서적 거부감, 즉 성이란 수치스럽거나 위험한 것이라는 학습된 감각이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한 세대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 다음 세대에게도 빈칸으로 남겨집니다.


사실 우리도 지도 없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쿤데라의 말처럼, 삶은 누구에게도 리허설을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아이를 처음 낳는 순간, 우리는 모두 처음 걷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있습니다.


지도가 없는 것까지는 같습니다. 하지만 이정표도 없습니다. 비슷한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도 거의 없습니다. 어디서 쉬어가야 하는지, 어느 갈림길이 위험한지, 물어볼 사람도 드뭅니다.


딸을 키우는 한 어머니는 그 길의 낯선 갈림길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아이가 음악을 듣다 검색으로 넘어가고, 검색이 어른들의 세계로 이어지는 것. 차단을 걸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영상은 진짜가 아니야. 근데 OO이가 이걸 진짜로 믿을 것 같아서 엄마가 걱정이 되고..."


어느 세대의 부모도 이 길을 먼저 걸어간 적이 없습니다. 지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길 자체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빈칸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반드시 채워야 할 순간이 올 때까지.



그래도 가르쳐야 한다


학교에서 전화를 받았던 그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상하긴 했어요. 인간적으로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감정일 건데. 근데 아이 마음을 헤아리니 속이 많이 상하기도 했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구나..."


아이의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세상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또 다른 어머니는 이 고민을 다른 방향에서 꺼내셨습니다.


"이성에 대한 문제도 있어요. 여자애를 좋아해요. 근데 그 여자애가 놀림 당할까 봐. 우리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 아이가 걱정되더라고요."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 동시에 아이의 감정이 향한 상대방도 헤아려야 하는 자리. 그게 이 어머니들의 자리였습니다.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이 질문 앞에서 어머니는 지도도 없이 안개 속에 세워진 것 같은 감각을 경험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역할 모호성(Role Ambiguity)이라고 합니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는 이 모호함을 더 깊이 겪습니다. 일반적인 성교육 자료나 지침이 이 아이들에게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결국 더 고립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Shakuri와 Alzahrani의 연구(2023)는 이 현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성적 행동이 밖으로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미리 준비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도가 없다는 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지도를 함께 그리는 일



민망하다고 하셨던 그 어머니는 혼자 감당하는 것의 한계를 느끼면서, 조금씩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냥 이뻐하기만 할 뿐이지.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걸 몰라요."


남편 이야기를 꺼내실 때, 그분의 목소리에는 원망보다 피로가 더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도를 받지 못한 건 어머니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이 아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앤데, 아빠가 가르쳐야지. 제가 얘기해봤자 이게 아니잖아요."


아이 아빠에게 계속 이야기를 건넸다고 하셨습니다.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창피하긴 한데 제가 지금도 목욕을 시켜요. 아빠가 좀 해달라고 계속 부탁을 하고 있죠."


창피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안고 계셨습니다.


지도를 그리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연구에서 만난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무한 반복이라고.


여유가 있을 때는 천천히 설득합니다. 여유가 없을 때는 울면서 붙잡고 하소연합니다. 그래도 다음 날 다시 합니다.


발달장애 청소년 성교육 연구에서 실제로 쓰이는 도구 중에 서클(Circle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이 위에 동심원을 그립니다. 가장 안쪽은 나 자신, 그 바깥으로 가족, 친구, 지인, 낯선 사람. 각 원마다 허용되는 거리와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그려주는 것. 어머니들이 받은 적 없는 지도를, 아이에게는 건네주려는 시도입니다.


아이 아빠와 함께 그 지도를 그려가는 것도 그런 시도 중 하나였습니다. 혼자 감당하던 무게를 나누는 일, 지쳐있으면서도 다시 말을 거는 일. 그것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도를 함께 그리려 한 것이었습니다.

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 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 아빠와 나누기 시작한 대화, 창피함을 안고도 아이 곁에 머문 시간들, 울면서도 다음 날 다시 반복한 그 하루들.

그것이 이미 지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걷는 길을 걷는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남기는 발자국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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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도 받은 적 없는 지도가 있나요?


낡아서 잘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누군가 건네준 것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 자리에서 머뭇거린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그 길을 걷기 시작한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은 조용히 그것만 인정해도 됩니다.


이 글이, 같은 빈칸 앞에 홀로 서 계신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떠오르신다면, 살며시 건네주셔도 좋겠습니다.




힐링인사이트 노수정이었습니다 :)




[참고문헌]

Punjani, N. S., Scott, S. D., Hussain, A., Lu, T., Bandali, F., McDonald, S., Scott, L. A., Sultan, S., Kennedy, M., & Lim, M. (2025). A scoping review of parent-based barriers to parent–child communication about sexuality. Sexual Health, 22(5). doi:10.1071/SH25076

Shakuri, M. A., & Alzahrani, H. M. (2023). Challenges of sex education for adolescents with autism spectrum disorder from the Saudi family's perspective. Frontiers in Education, 8, 1150531. doi:10.3389/feduc.2023.1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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