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통과하는 자리에서 자란 아이에게
"그게... 외로웠던 것 같아요"
어머니 E님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유치원도 따로 보냈고, 늘 등원도 따로 시켰다고 했습니다. 아빠도 애를 써서 둘째와 시간을 보내려 했다고요.
그러다 어느 날, 원체 말을 잘 안 하는 둘째에게 돌려돌려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울면서 얘기하더라고요."
그 말을 꺼내는 E님의 목소리가 메어 왔습니다. 죄책감이 켜켜이 쌓인 목소리였습니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아이의 울음은 닿지 못한 자리에서 혼자 고여 있었다는 사실. 그 무게가 그대로 목소리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 아이도 울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서.
빛이 통과하는 자리의 이름
해외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Glass Child', 우리말로 '유리 아이'라고 부릅니다. 2010년 앨리샤 메이플스(Alicia Maples)가 처음 대중에 소개한 이 개념은, 장애 형제자매를 둔 비장애 아이들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유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아이들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부모의 시선이 자신을 통과해서 다른 아이에게 닿기 때문입니다.
유리는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빛은 닿지 않고 통과해 버립니다. 그늘도 생기지 않습니다. 있지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것은 결코 부모의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장애라는 압도적인 요구 앞에서 가족 전체가 '생존 모드'로 전환될 때,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E님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애를 썼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제 연구에서도 이 장면은 여러 층위로 나타났습니다. 참여자 A의 비장애 자녀는 형보다 발달이 빨랐지만, 집 안에서 "눌려 지내며 기가 죽어" 결국 심리상담을 받아야 했습니다. 참여자 C의 집에서는 누나가 동생 곁에서 그렇게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왕영선과 김정민의 연구(2013)는 비장애 형제자매가 역할 과중과 소외감으로 높은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우울이나 분노, 성취 압력을 느끼기 쉽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어려움이 더 복잡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마음을 꺼내지 않습니다.
내가 보태지 않아도 부모님이 이미 충분히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옆방에서는 장애 형제가 감정을 날것으로 터뜨립니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곁에서 비장애 형제는 반대로 움직입니다. 더 조용해지고, 더 참아내고, 더 작아집니다. 터뜨려도 되는 아이 옆에서, 터뜨리면 안 될 것 같은 아이로 자라는 겁니다.
그 조용함은 단순한 배려가 아닌 '모두가 이렇게 힘든데, 내가 힘들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처절한 자기 검열의 결과입니다.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유리 아이 연구(2025)는 이들이 겉으로는 밝고 씩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은 척을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이들은 부모의 상황을 인지적으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워합니다. 이해와 수용 사이의 간극에서, 감정은 안으로만 쌓여갑니다.
연구자들은 이 패턴을 가진 아이들에게서 공통된 내면의 목소리를 발견했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안 돼. 부모님은 이미 충분히 힘드니까. 나는 무조건 잘해야 해.' 아마 주변 어른들의 스쳐가는 말을 내면화했을지도 모르지요.
여기에 더 무거운 이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부모화(Parentification)'입니다. 비장애 형제가 장애 형제를 보살피고, 부모의 정서적 고민을 들어주고, 집안의 갈등을 중재하는 성인 수준의 역할을 조용히 떠맡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종종 "의젓하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으며 자랍니다.
하지만 그 의젓함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이 아이들은 도움을 청하는 일 자체를 일찌감치 포기합니다. 혼자 해결하고, 혼자 삭이고, 혼자 버팁니다. '나는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익혀버린 아이. 칭찬받을수록 더 깊이 그 자리에 갇히는 아이. 그 의젓함이 감정을 꺼낼 자리를 찾지 못한 결과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장애 형제의 돌발 행동이 일어났을 때 비장애 자녀에게 "이건 네 탓이 아니야"를 명확히 말해주는 것. 연구는 이 한마디가 아이의 자책감을 줄이는 데 결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오래전부터 그 말을 기다렸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온전히 닿지 않았던 이유
참여자 F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둘 다 저의 자식이고 동등하게 해줘야 되는데, (장애 자녀)한테는 조금 더 마음을 대신 대변해 준다고 할까요."
말을 잇는 목소리가 떨려왔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두 아이를 모두 사랑한단 것을요. 다만 한 아이의 필요가 더 크고 더 급했을 뿐입니다.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집 안의 공기가 그렇게 흐르다 보면, 몸이 먼저 그쪽으로 맞춰집니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그것이 충분히 닿지 않을 수 있다는 것.
E님이 쏟아낸 에너지가 부족했던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에너지가 먼저 향하는 곳이 있었을 뿐입니다. 다른 아이는 그 방향을 일찌감치 알았을 뿐입니다.
잡히지 않는 슬픔에 대하여
심리학에서는 이 아이들이 겪는 상실을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이라고 부릅니다. 형제자매는 곁에 존재하지만, 무언가 함께 깊이 나누기 어렵습니다. 부모님도 곁에 계시지만, 온전히 나만을 바라봐 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안개속에 흐릿하니 잡히지 않습니다. 애도할 대상이 없으니 슬퍼할 수도 없습니다.
그 잡히지 않는 슬픔 속에서, 아이는 하나의 신념을 체득합니다.
'내가 조용히 있으면 우리 집이 평화롭다.'
친구와 싸우고 온 서러운 날,그 아이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를 먼저 읽었을 겁니다. 오늘 내가 말해도 되는지 안되는지. 그 연습을 오래 한 아이는 나중에 서서히 입을 닫게 됩니다. 다만 그 평화가 아이의 어린 시절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 뿐입니다.
연구자들이 비장애 형제자매에게 가장 먼저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형제의 보호자가 아니라, 그냥 아이여도 괜찮아."
이 말이면 충분합니다.
E님은 나중에 이런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그 이유는 아이가 울면서 말할 수 있는 엄마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아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일
그 뒤로도 저는 E님에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아이 쪽으로 빛이 닿을 수 있을까.
연구자 하우켈란드(Haukeland) 등은 부모가 하루 중 단 15분이라도 비장애 자녀와 온전히 시간을 보낼 때, 아동의 불안이 급격히 감소함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온전히'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장애 자녀의 스케줄을 챙기거나 치료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15분만큼은, 엄마가 '장애 자녀의 대변인'이 아니라 오롯이 '이 아이의 엄마'로만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그 차이가 아이에게는 느껴집니다.
E님이 그날 돌려돌려 물어봤을 때, 아이는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해결된 게 없었는데도. 아마 그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처음부터 그것뿐이었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나한테 물어봐 줬다는 것.
혹시 지금, 당신 집 어딘가에 조용히 있는 아이가 떠오르셨나요.
오늘 저녁 그 아이 곁에 잠깐 앉아주세요. 특별한 말 없이도 괜찮습니다.
힐링인사이트 노수정이었습니다 :)
[참고문헌]
김다혜, 한재희 (2023). 지적장애 형제를 둔 비장애 형제자매들의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지적장애연구, 25(1).
왕영선, 김정민 (2013). 발달장애아동 가족의 탄력성 강화를 위한 인지행동치료 프로그램의 개발 및 효과.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25(4), 773-794.
Maples, A. (2010). Glass children. TEDx Talk.
Haukeland, Y. B., et al. (2020). 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for families living with chronic conditions. Frontiers in Psychology, 11.
The Lived Experiences of Glass Child (2025). All Multidisciplinary 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