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신분으로서의 마지막 주말.

D-2

by 서치호

어제 거나하게 마시고 들어왔더니 그래도 내상이 없지는 않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뒤엎은 지금 일상이 완전히 바뀌었고, 시대착오적으로 강제적 통금시간 마저 생겨버려 마음대로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졌다. [술집이며 음식점이며 pm. 9:00이라는 강제 홀 영업 종료시간이라는 게 정해져 있으니 속히 집에 귀가하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통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쨌든 주말이다. 주말은 휴직자에게나 현직자에게나 크게 다를 바 없다. 늦잠 자고, 늘어지고 게으름 피워도 문제 될 게 전혀 없는 편안한 주말. 아직 육아휴직 집행 전이긴 하나 나는 이제 곧 신분이 바뀌고, 그래서인지 어제 마신 술의 숙취가 남아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번뜩 눈이 떠졌다. 이제 곧 휴직기간이니 그 사이에 뭔가 시간을 의미 있고 생산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계속해서 나를 밀어붙인다. 주말임에도 늘어지지 못하도록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이 심리적 압박감 때문이리라.

요즘 내 삶에서는 나의 모든 기준이 육아휴직에 맞춰져 있다. 육아휴직을 1차 목적지로 삼은 뚜렷한 Milestone 에 말이다. 육아휴직 직전까지는 이렇게 생활하고 개시 직후부터는 저렇게 해야지 라는 다짐들이라던가 그전까지 이러이러한 것들을 마련해놓아야 할 텐데라는 조바심 섞인 계획들까지. 며칠 남지 않았지만 내 삶의 모든 행동지표들은 육아휴직이라는 Milestone 에 모든 초점이 정확하게 맞춰져 있다.

다행히 어제 격하게 테니스를 치고, 회포를 푼다며 먹고 마시면서 즐겁게 떠들어 댄 덕분에 엊그제 회사에서 퇴근하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느꼈던 적을 잃었다는 상실감이나 그에 비롯한 우울감은 거의 다 회복되었다. 마지막 주말을 무얼 하며 보내면 좋을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다가 얼토당토않은 자기 타협에 빠져버렸다. 나는 원래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지금 하고 있던 것들을 마무리하고 다 치우고 정리한 뒤에 새롭게 시작하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 마디로 멀티태스킹이 안된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의 산만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즉각적인 요이~땅! 이 안된다. 그래서 공부를 못했던 것 같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뭔가 시작해야 하면 그 즉시 거기에 집중하는 몰입력이 부족하다. 가만히 보면 대의명분을 좋아하고 구색 맞추기 따위에 관심이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그 시작이 두려워 괜히 주변을 끄적거리는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나 얼토당토않게 타협한 것이란 게 다름 아닌 게임. 종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PC 게임을 즐겨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On-line 으로 하는 게임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20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리고 지금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스타크래프트 조차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주로 하는 게임은 스토리가 탄탄한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다. 툼레이더 리부트, 레지던트 이블, 라스트 오브 어스, 배트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게임들이 내 인생게임이다. 주인공을 조작하며 주인공의 시점으로 주인공에 몰입되어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 그 끝을 보고 나왔을 때 면 그 어떤 명화를 보았을 때보다 더 진한 감동과 여운이 남는다. 최근 내가 하고 있던 게임은 꽤 오래된 게임이지만 몇 년을 미루다 작년 가을에서야 다시 잡았던 배트맨 : 아캄 나이트. 현재 80% 수준까지 스토리가 진행되었는데 한 번 빠져들면 또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내가 아니던가. 육아휴직 중에 게임에 손을 대면 정말이지 게임만 하다가 모든 걸 말아먹기에 불 보듯 뻔해서 게임을 손절하려던 차였다. 하지만 거의 다 완료한 게임에 칼같이 등을 돌려 1년 동안 다른 중요한 일에 몰두하자니 자꾸만 아쉽고 미련이 남아 나의 육아휴직 프로젝트에 몰입하는데 방해를 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지금 끝내버리자는 타협을 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허울만 좋은 실속 없는 명분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기 합리화에 나는 그만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켜고 게임을 실행시킨 뒤 조이패드를 잡았다. 게임을 시작하고 플레이에 집중하고자 하는데 이상하게도 시시하고 재미가 없었다. 내가 도대체 이걸 왜 하고 앉아있는지 갑자기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동안의 Mind Set Training 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흔하지만은 않은 아빠의 달 육아휴직을 결정하고 나서 정말 많은 고민을 해왔다. 먼저 나름대로 세워 본 육아휴직의 당위성을 마련해보았다.


1) 요즘 직장인 아빠들 중에서 제 나름대로의 뜻이 있는 아빠들은 그래도 고심 끝에 어렵사리 실행하는 아빠의 달 육아휴직이지만, 그래도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렇게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아빠들의 수가 크게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육아휴직은 그것을 결심의 때 확실한 목적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육아휴직 중의 삶에 아이와 함께 아이를 돌보는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자신만의 색을 입혀 나만의 결과를 만들어 내어야만 한다는 분명한 목표 말이다. 그것이 내가 육아휴직을 시행하는 대전제이자 당위성이었다.

2) 육아휴직이 매너리즘을 탈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이들 양육에 정말로 부모 중 한 사람이 잠깐이라도 직장생활을 멈추고 육아에 시간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고 부모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회사 다니는 것이 지겨워서 잠시 회사를 떠나 있고 싶은 마음에 선택하는 육아휴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3) 직장에서 주류에 들지 못한 직원이 더 이상 성과를 인정받지 못한다거나 조직 내에서 입지를 상승하는데 한계를 느껴 더 이상의 Career 개발이라는 가치를 스스로 손절하고 샛길로 새는 양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아휴직 이전부터 조직에 확실한 역할이 있고 조직에의 높은 기여도를 통해 인정받는 인재라는 Positioning 이 필요하다. 나는 성격상 입사 이후부터 지금까지 육아휴직과는 상관없이 괜찮은 성과를 내며 어느 정도는 인정받는 위치에까지 와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에 대해서는 추후 좀 더 세밀하게 다루게 될 기회가 있으니 지금은 일단 이 정도로 간단하게만 소개를 마친다. 여기서 항목 1) 은 포함하는 가치가 매우 포괄적이며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깊이가 좀 있는 개인 개발계획이 존재하는 부분인데, 여기서 상당한 Mind Set Training 이 필요했다. 자기 암시, 명상 등등 효과가 있었을지 없었을지 잘은 모르지만 어디로 튈지 나조차 모르는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노력이라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이런 과정을 겪은 이유에서였을까?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생활 가치관이 완전히 육아휴직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마음가짐 역시 최적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즐겨하고 재밌어하던 게임의 Ending 을 코앞에 두고 시시해져 버리다니 나조차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실증을 느껴버린 나는 컴퓨터를 끄고, 책 한 권 커피 한잔과 함께 마음의 양식을 채우는 쪽을 택했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전처럼 짜증이 나거나 신경이 크게 쓰이지는 않았다. 결국 육아휴직 전의 마지막 주말은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온 가족이 저마다 흥미를 느끼는 각자의 것을 하면서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냈다.

육아휴직을 선택하고 난 뒤, 변화된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렇게 나는 나의 직장인 신분으로서의 마지막 주말을 조용히 즐기며 보내주었다.


작가의 이전글준이의 첫 번 째 졸업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