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훈, 복효근, 함석헌
두 발 뻗고 맞이한 방학 중에 있어요.
당분간 방학은 계속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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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난 지 오래지만,
아직도 머물러 있는 늦여름의 더위와
아침의 숲이 주는 특권을 누리며 흘러요.
그렇게 핸드폰 사진첩을 우연히 열게 됐고,
지난 시간들이 총천연색으로 예쁘게 기록된
아이들과 함께 여행했던,
유럽의 여러 도시들과
다시금 당도할 수 없는 다양한 추억들을 마주합니다.
그렇게 고요함 속에서,
평안이 깃든 미소가 얼굴에 번져감을 만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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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랜 시간 이곳에 묵혀 두었던,
세편의 시를 발견하게 됐어요.
다시 봐도 참 좋네요.
# 1
사랑
한용운
봄물보다 깊으니라
갈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 2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 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 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 했던 흔적이라면
이 발 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덧 - 시의 연은 내 맘대로 나눠 봤습니다.
# 3
마음에 부치는 노래
함석헌
세상이 거친 바다라도
그 위에 비치는 별이 떠 있느니라
까불리는 조각배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눈 떠 바라보기를 잊지마라
역사가 썩어진 흙탕이라도
그 밑에 기름진 맛이 들었느니라
뒹구는 한 떨기 꽃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뿌리 박길 잊지 마라
인생이 가시밭이라도
그 속에 으늑한 구석이 있느니라
쫓겨가는 참새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사랑의 보금자리 짓기를 잊지 마라
삶이 봄 품에 꿈이라도
그 끝에 맑은 구슬이 맺히느니라
지나가는 나비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영원의 향기 마시기를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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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시 모두 울림이 있지만,
저는 특히 세 번째 함석헌 선생님의 시가
마음과 정신 깊숙이까지 들어옵니다.
이번 가을은 이 세편의 시들을 외우고,
시구를 음미하며
천천히 마음에 읊어 봐야겠습니다.
그렇게,
시로 정서를 정신을 영혼을 물들이고,
어여삐 물든 그것들로 충만한 가을을 만들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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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래전,
이들을 내게 머물러둔 이유를 발견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