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너밖에 없어

by 이야기여행자

“여기 맥주 500 한 잔 추가요!”

동네 호프집이었지만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가게는 늘 붐볐다.
처음엔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자 사장님과 선임 아르바이트생은 사소한 것까지 트집을 잡았다. 뒷정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왜 보느냐는 둥 같은 말들이었다. 처음엔 내가 부족한 줄 알고 고치려 애썼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만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똑같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정리가 완벽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어 달을 버티다 그만뒀고, 근처 호프집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대형 치킨 프랜차이즈 매장이었고, 주말 근무는 30대 남자 사장과 또래 남자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나까지 셋이었다. 이곳에서는 깔끔하고 싹싹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같은 사람인데 누가 어떻게 봐주느냐에 따라 내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는 사실에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여기서도 벌써 석 달째였다. 10월부터는 수능이 얼마 안 남은 시점이라 그만둘 생각이었고, 다행히 학원비는 엄마가 대어주고 있어서 아르바이트비는 조금씩 모을 수 있었다.


호프집에는 아빠 또래의 아저씨들이 많이 왔다. 그중 혼자 와서 소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의 매번 문제가 됐다. 옆 테이블에 시비를 걸거나, 취해서 토를 하거나, 테이블에 엎드려 자곤 했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줘!”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는 사장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저 아저씨 지난번에도 난리였는데요.”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도 술을 마시면 저렇게 될까.
내가 아는 아빠는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서 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꺼내 내 손에 쥐여주던 사람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오거나,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갖고 싶은 게 뭐냐고 묻기도 했다. 그때는 귀찮기만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들이 겹쳐 떠올랐다.

결국 아저씨는 경찰이 오고 나서야 정리됐다.

딸과 호프집 사장의 대화

사장은 테이블을 닦으며 말했다.

“가게 하다 보면 저런 사람들 많아. 그런데 알고 보면 다 사연 있어.”

“사연이요?”

“저 아저씨, 얼마 전에 하나뿐인 딸을 잃었다더라.”

나는 순간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전에 딸이랑 같이 와서 맥주 마시던 사람인데… 그때는 멀쩡했는데…”

“…”

“그 뒤로 저렇게 저래.”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남았다.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와 말을 하지 않은 지 벌써 다섯 달이 넘었다. 화난 얼굴도, 차가운 얼굴도 아닌, 예전에 나를 안아주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보고 싶었다.
목소리도.


9월 모의고사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6월 모의고사보다도 더 성적이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여전히 ‘인서울’은 어려웠다. 재수를 시작할 때만 해도 1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월쯤부터 자신감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버거웠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시작했는데, 스스로 포기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 말대로 일단 대학에 가서 반수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 전 엄마에게 내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엄마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다. 재수하는 것도 인생의 경험이고, 이를 통해 내가 세상을 좀 더 알게 된 거라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말에 안심하면서도 아빠가 이사실을 알면 어떨지 상상이 되어 다급히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지금 한말… 아빠에게는 비밀이에요. 알았죠?”

예전에 아빠와 크게 싸우고 외갓집으로 갔던 날, 외할머니는 나를 달래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래도... 네 아빠 같이 착한 사람 없어.”

그 말이 지금에서야 조금 이해되는 것 같았다.
아이패드에 띄운 성적표를 한참 바라보다가 화면을 껐다.


지금의 나는 아빠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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