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너 정도면

by 이야기여행자

딸의 수능은 끝났고,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막상 결과를 받아 들었을 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심 ‘인서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지방 국립대, 그것도 대기 합격이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간 아이의 학업 태도나 집중력, 성향을 봤을 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고, 아내 역시 “그래도 어디야”라며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딸은 재수를 하겠다고 했다.

작년 말쯤부터 나와 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딸은 방에서 나와 밥을 먹었고, 여전히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였지만 거실에서 TV도 보고, 코코와도 놀았다. 겉으로 보기엔 집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큰 말다툼도 없었고, 서로를 피하던 시간도 자연스럽게 흐려졌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커지지도 않았으니까.

아내는 딸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림아… 재수는 쉬운 게 아니야. 학교 다닐 때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해야 해.”

나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재수의 어려움, 성공 확률, 비용과 시간 대비 효율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어질지, 결과가 바뀔 가능성이 얼마나 낮은지, 굳이 이런 선택을 할 필요가 있는지 근거를 모아 설명했다. 설명을 하면 상대가 이해할 거라고, 이해하면 포기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해버렸다.


“아빠는 지원 못 해준다. 차라리 그 돈으로 정말 불쌍한 아이들 도와줄 거야.”

말이 떨어지자 집 안의 공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아르바이트해서 재수할게요. 아빠한테 돈 달라는 말 안 하면 되죠?”

아내가 급히 말을 이었다.
“세림아, 그게 아니라… 네가 힘들까 봐 아빠가 그러시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은 딸에게 닿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한 번 내뱉은 말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각자 자기 방식대로 결론을 내렸고, 그 결론은 다시 우리를 갈라놓았다.


딸은 주말 알바를 구했고, 주중에는 재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는 내게 말하지 않고 학원비를 댔고,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대신 다시 딸과의 대화를 끊었다. 이 정도 거리를 두는 게 서로에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으면, 적어도 더 망가지지는 않을 테니까.

가족들 간의 대화

6월이었다. 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해져서 오랜만에 대학 동기와 치킨집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공원을 바라보니 딸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커플들도 많았고, 모두들 지금 이 계절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림이도 그냥 대학 다녔으면 저렇게 지냈을 텐데.”

내 말에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등록 포기하고 재수하는 거야?”
“어. 솔직히 말해서… 절대 될 리가 없잖아.”

친구는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래도 네 딸은 예쁘고 착하잖아. 내 딸 얘기 들으면 기절할걸.”
“외고 다닌다며? 난 그렇게 공부 잘하는 딸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친구는 잠시 웃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 대학 간다고 해서... 학비가 비싸서 안 된다고 했더니, 그런 것도 못 해주면서 왜 낳았냐고 하더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조용히 말했다.


“세림이는 아르바이트해서 학원 다니잖아. 그거 대단한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래, 적어도 우리 딸은 책임감이 있다. 남 탓하지 않고 자기 몫을 하려고 한다. 나는 그 생각에 조금 안도했다.

아내는 얼마 전 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다. 딸이 아빠에게 맞을 것 같아 경찰에 신고했고, 결국 엄마와 함께 제주도로 한 달 살기를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우리 세림이는… 그렇게 싸워도 결국 당신한테 웃잖아요.”

처가에 갔을 때 장모님은 딸 이야기를 하며 웃으셨다. 아르바이트비로 화장품을 사다 드렸다고 했다. 세림이는 양쪽 할머니에게 매니큐어도 발라주고, 찜질방도 함께 가는 살가운 아이였다.


“그래… 공부만 빼면 참 괜찮은 애지.”

그 말이 입에 자연스럽게 붙었다.
나는 그날 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러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두 통을 샀다. 집에 돌아와 냉동실에 넣어두었지만, 딸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아빠로서 할 만큼 했다고.
그래도 이 정도면 최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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