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破滅)
한성신보 앞거리는 오늘따라 더욱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일본 상인과 조선 관리들이 엉켜 다니고, 가마 대신 인력거가 종종 지나갔다.
만덕은 사람들 사이에 치이며 가까스로 입구를 지켰다.
‘아이고… 눈이 어지러워서 죽겠구먼.’
박상궁이 만나보라던 일본인.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만덕은 슬슬 짜증이 올라와 신경질적으로 치맛자락을 털었다.
“만덕 양이시오?”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젊은 일본 청년이 서 있었다.
기름 냄새가 은근히 나는 머리에 양복, 둥근 안경까지. 모습은 말끔했고, 무엇보다 낯선 세계의 향기가 났다.
만덕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사내가… 내게 말을 붙인다고?’
그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식사했소?”
“아뇨… 아직요.”
“그럼 함께 가시지요.”
박상궁의 ‘물건만 주고 바로 돌아오라’는 말이 스쳤다. 그러나 이 사내를 그냥 보내면 인생의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닐까? 만덕은 단 두 걸음만 고민했다
‘밥 같이 안 먹으면 이 남자가 물건을 안 받겠다고 했다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만덕은 손을 모으고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예. 같이 가죠.”
식당 안은 만덕이 평생 보지 못한 세계였다. 서양식 의자, 커피 향, 양복 입은 사람들… 그리고 코 높고 머리 색이 다른 양인들까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고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만덕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아이고… 여긴 나 같은 잡령이 올 데가 아닌데…’
그는 자연스레 의자를 빼줬다.
“편하게 앉으시오.”
그의 말투는 친절했고, 조선말도 매끄러웠다. 만덕은 자신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일본 공사관에 근무하는 통역관이라 했다. 그는 조만간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조선 여인을 한 명 데려가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도 얼핏 흘려서 만덕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눈에 익은 얼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숙정문 밖에서 보았던 그 보자기를 받아가던 조선인 사내였다.
만덕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앗! 저 남자—”
그가 만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이오?”
“예… 엊그제 심부름하다 잠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다.
“누가 시켜서 만난 것이오?”
순간 만덕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자신을 ‘믿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만덕의 머릿속엔 한 생각이 뱅 돌았다.
‘이 사람한테 잘 보이면… 내 팔자 좀 바뀌는 거 아닌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사실은요…”
그리고 최상궁이 시킨 일, 박상궁이 한성신보로 보내려 했던 일, 숙정문 밖에서 물건을 전해준 일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끔 “음…”, “그렇군…” 소리만 내며 들었다. 하지만 표정은 냉정하게 차가웠다. 만덕은 그것이 ‘진지하게 자신을 믿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그가 만덕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만덕 양.”
만덕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조만간 궁으로 찾아갈 것이오. 그때 봅시다.”
그 말에 만덕은 온몸이 떨리도록 설렜다.
‘일본인과... 그와 가까워지면… 나도 곧…!’
그녀는 인생이 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만덕과 헤어지자마자 표정을 싸늘히 굳히고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공사관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사무라이 복장을 한 50세 정도 되는 남자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고, 앞에는 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미우라 상. 궁에서 온 물건은 받았습니다.”
“오오… 오카모토. 잘했다. 또 다른 정보는?”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낮게 말했다.
“황후 측에서… 이범진을 통해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오늘 궁에서 온 여인에게서 들은 정보입니다."
미우라는 천천히 눈을 감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 역시 움직이는군.”
오카모토는 미우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거사를… 하루 앞당겨야 합니다.”
미우라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좋다. 히가시와 아라이를 들라 해라! 여우사냥을 시작하지!”
새벽 4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만덕은 한창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소란이 그녀를 깨웠다.
“만덕아! 일어나! 밖이 수상해!”
잡령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만덕은 허둥지둥 옷을 입고 문을 열었다.
칼을 든 그림자들이 궁 담장을 넘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헉… 이게 뭔 소리야… 설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서 들어가요! 머리 숙여!”
여인들의 비명이 건청궁 안을 울렸다. 정체 모를 남자 수십 명이 마당을 가득 채웠고, 곧이어 남자들은 궁녀들을 모두 옥호루 2층으로 몰고 올라갔다.
궁녀들은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누가 황후인가! 안 나오면 모두 죽이겠다!”
그 악에 찬 목소리. 만덕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 외침은 바로 오카모토였다. 그가 또박또박 조선말로 우리를 향해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는 만덕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아주 잠깐, 아주 얄밉게 올렸다.
‘…저 남자는 왜 저러지? 나한테 왜…’
“앞줄 궁녀부터 앞으로 나와라!”
남자들이 궁녀 한 명을 붙잡아 옥호루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꺄악!!!”
비명과 동시에 궁녀들이 무너져 내렸다.
만덕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엎어지며 속으로 반복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난 어찌 되는 것이지?’
그때, 최상궁이 떨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 다른 이들은 모두 놓아주시오…”
궁녀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냉혹했고 용의주도했다. 상궁의 저고리를 벗겨 확인한 뒤, 아이를 낳은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최상궁을 단칼에 밀어버렸다.
피가 흩날렸다.
그 순간, 미우라가 등장했다. 박상궁이 그의 곁에 있었다. 미우라가 박상궁을 향해 눈짓했다.
만덕은 그 순간, 박상궁이 평소 일본인과 가까이 지내던 모습을 떠올렸다.
박상궁은 궁녀 떼 속에서 황후를 가리켰다.
“저기에… 계십니다.”
황후는 사내들에 터덜터덜 끌려 나와서,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만덕은 황후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이게… 이게 나 때문…?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으면… 내가 저 일본 사내를 안 만났으면…’
오카모토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옷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만덕 옆에 서서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소. 덕분에 일이 쉬워졌소.”
그게 전부였다. 고마움도, 미안함도 전혀 없었다. 그저 일을 해낸 도구에게 하는 말.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려 다시 일본인들이 사라진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내에게 자신은, 궁의 잡령과 다를 바 없는 하찮은 패 하나였을 뿐이라는 걸.
만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삼켰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내 팔자 좀 바꿔보겠다고…”
“내가… 무슨 짓을…”
건청궁의 어둠은 만덕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