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상)

욕망(慾望)

by 이야기여행자

선선한 바람이 저고리 밑으로 파고들어 서늘했다. 한낮의 맑은 하늘 아래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른 가을의 소나기는 예고 없이 퍼부었다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만덕은 머리에 보자기를 이고 옷가지를 그 위로 덮고서는 종종걸음으로 궁으로 향했다.
‘비 맞으면 옷값 물어내라 할 텐데… 오늘은 제발 비 좀 안 왔으면 좋겠네.’

건청궁 입구에 다다르자, 창을 짚은 관원이 길을 막았다.

“서라.”

“건청궁 잡령 만덕이오. 상궁 마마 심부름으로 육전거리 다녀오는 길이옵니다.”

관원은 위아래로 만덕의 몸을 훑더니,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라.”

만덕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흥. 매번 보면서도 사람을 걸러. 저 눈은 왜 또 반짝여? 나한테 농이나 치자는 거 아녀?’

만덕은 어릴 적부터 고운 외모 때문에 남정네들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궁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깨달았다. 양반이든 군졸이든, 남자라는 족속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내 팔자도 언제까지 이런 궁궐 심부름꾼이어야 하누… 왕비마마처럼만 살면 좋겠다, 정말.’


건청궁 앞에 이르자 최상궁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궁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냉랭한 표정이 떠 있었다.

“네 이년. 뭣을 하다가 이리 늦었느냐?”

“뭣을 하다니요. 포목집에서 비단을 늦게 주길래… 제가 억지로 받아온 거예요. 참말로.”

만덕은 억울한 얼굴을 하고 손등에 묻은 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뛰어오느라 땀이 범벅이 됐지 않습니까. 여기 보세요.”

최상궁은 만덕의 적나라한 땀자국을 보고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귀한 물건에 땀이 배인 건 아니겠지.”

“아이고, 그래서 제가 머리에 이고 왔잖아요.”

만덕은 싹싹하게 웃었다. 잡령치고는 눈치도 빠르고 말도 잘해 궁녀들 사이에서 신뢰가 있는 편이었다. 다만 화장이나 남정네들에 관심이 많다는 뒷말이 돌곤 했다.

“알겠다. 들어가 쉬거라.”

“예, 마마.”

최상궁이 돌아서는 듯하다가 다시 만덕을 불렀다.

“그리고… 요새 궁 안팎이 흉흉하다. 너, 다닐 때 고개 숙이고 다녀라. 쓸데없이 눈길 주지 말고.”

“… 예.”

만덕은 속이 씁쓸하게 타올랐다.
‘아니, 대체 나보고 뭘 조심하라는 건데? 사람이 사람 좀 보면 어때서.’


그날 밤, 만덕은 잠자리에서 천장을 보며 투덜거렸다.

‘내일은 한성신보에 다녀오라 했는데… 일본인들 많다지? 흠… 내가 일본인 몇 명만 잘 알아두면… 혹시 팔자 좀 바뀌지 않을까?’

그녀는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천민이 궁녀가 되고, 궁녀가 상궁으로 올라가는 것은 피 말리는 경쟁이 필요했다. 혹시 일본인들과 가까워지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만덕은 그런 종류의 희망을 버린 적이 없었다.


해가 제대로 뜨기도 전, 박나인이 숨을 헐떡이며 방으로 들이닥쳤다.

“만덕아! 일어나라. 최상궁마마가 찾는다.”

‘아이고, 새벽부터 왜 저러시나…’

만덕은 투덜거리며 저고리를 챙겨 입고 상궁의 거처로 향했다.

최상궁 앞에는 보자기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뭔가 묵직하고 단단한 형태가 느껴졌다.

“네가 긴히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최상궁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딱딱했고, 방 안에는 묘하게 불길한 공기가 깔려 있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최상궁의 손끝이 아주 살짝 떨리는 것이 만덕의 눈에 들어왔다.

최상궁과 만덕이의 대화

“아무 말하지 말고, 숙정문 밖으로 나가면 사내 하나가 기다릴 것이다. 이걸… 전해주거라.”

만덕은 보자기를 들었다. 손에 닿는 감촉은 단단했다. 둥글거나 네모난 물건이 아닌, 길고 가느다란 무엇. 마치… 칼집 같은 형상.

만덕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마… 그런데 오늘 아침에 박상궁마마께서 저더러 시킨 일이 있는데요. 그건—”

최상궁의 눈빛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네 이년. 네가 누구의 잡령인지 잊었느냐!”

만덕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최상궁이 일본인과 친하게 지내는 박상궁을 얼마나 마음에 안 들어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최상궁 앞에서 박상궁 핑계를 대다니… 이건 분명한 실수였다.

“… 아녜요. 최상궁마마 말씀이 먼저죠.”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굵은 파문이 일었다.

‘숙정문? 거기는 일본인 상인들도 잘 안 가는 곳인데… 예사로운 심부름이 아니다. 뭐지…?’

최상궁은 마치 만덕의 속내를 읽기라도 하듯 낮게 속삭였다.

“입 싹 닫고, 다녀오기만 하면 된다. 오늘 일은… 더 말하지 마라.”

만덕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최상궁의 표정은, 평소의 엄함이 아니었다. 그건 공포였다. 그리고 무언가에 이미 깊게 얽혀버린 자의 얼굴이었다.


숙정문 밖에 도착하니, 회색 두루마기를 걸친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만덕이 다가가자 사내의 눈동자가 보자기 쪽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 왔나.”

만덕은 조심스레 보자기를 내밀었다.

“상궁마마 심부름으로 왔어요.”

사내는 말없이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휘익 열어 안을 확인했다.

잠시, 사내의 얼굴에 얇은 웃음이 스쳤다.

“이걸로… 모두 끝날 것이야.”

그 말투는 차갑고 차분했다. 마치 사람 목숨 따위는 이미 숫자로 치환된 듯한 느낌이었다.

만덕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저기, 무슨 물건인지 여쭤봐도—”

사내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묻지 마라. 묻지 않는 것이… 네 목숨에 좋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걸음걸이는 가벼웠지만, 방식은 군인처럼 단정했다.

만덕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그자… 조선 사람이었는데… 표정은, 마치 딴 나라 사람 같았어. 보자기 안에 뭐가 있는 거지?’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건청궁의 최상궁, 그리고 저 사내—
둘 다 같은 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덕은 가볍게 갈 수 없었다. 심부름 하나를 해온 것뿐인데, 어딘가에서 거대한 비극의 씨앗을 손에 쥐고 흔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그냥 심부름만 했을 뿐인데… 상궁마마가 시키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러나 그 씨앗이 누구를 향해 날아갈지, 만덕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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