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의 매개체...
아하를 알게 된 건 국민학교 6학년 때 만난 어떤 소녀 때문이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이제 막 대중가요에 눈을 뜨고 당시 아이돌 스타였던 박혜성이나 김승진에 열광할 때 그 소녀는 팝송을 듣고 있었고 심지어는 영어로 된 가삿말을 흥얼거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로 내가 그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남몰래 관심을 갖다가 결국엔 나도 팝송에 눈을 뜨게 되었다. 당시 그 소녀가 아하 외에 누구의 노래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하로 시작한 나의 관심은 마돈나와 에프알 데이비드, 라이오넬 리치 그리고 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왬은 아하와 더불어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튼 당시 김광한이 진행하던 지구촌영상음악에서 보여줬던 아하의 [Take on me] 뮤직비디오는 환상 그 자체였다!
노르웨이 출신의 모튼 하켓(Morten Harket), 폴 왁타(Paul Waaktaar), 마그네 푸루홀멘(Magen Furuholmen)의 3명의 젊은이로 이루어진 A-ha는 당시 영국과 미국으로 양분되던 팝의 세계에 새로운 열풍을 일으켰다. 이것은 스웨덴의 아바나 노르웨이의 활코 외에는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열풍은 한국에까지 몰아쳤고 이는 내가 좋아했던 그 소녀가 그래미어워드 신인상부문에서 긴장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던 그들을 아직도 기억하게 만들었으며(결국 당시 신인상은 샤데이가 탔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만화주제가를 흥얼거리던 나를 팝에 흥분시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소녀를 좋아하면서 가슴앓이를 할 때 아하의 노래를 참 많이도 들었다. 그러다 별다른 고백도 못하고 그냥 어린 날의 풋사랑으로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었을 때 더 이상 아하의 노래도 듣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아하의 노래를 듣게 될 때 소녀를 떠올렸고, 소녀를 떠올릴 때 아하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그 소녀도 나를 좋아했고 나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건네줬었다. 나는 며칠을 카드에 대한 답장을 쓸지 말지를 고민하고, 쓰고 나서 신발주머니에 넣어둔 채 며칠을 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겨울방학식날 친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할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편지는 소녀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나의 어린 고백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내가 편지에 어떤 말을 썼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판사판으로 나 너 좋아해!라고 쓴 것이 아닐까 자신 없게 생각해 본다.(하지만 아마도 빙빙 돌려 썼을 거다에 한표 던지고 싶다) 그 뒤로 졸업앨범 속 소녀의 사진을 보면서 그리고 겨울방학식날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후회했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만약 그때 고백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그렇게 소녀를 그리워하고 아하를 잊고 지내던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소녀도 나를 좋아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릴 적의 그 마음이 아직도 서로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린 2년여의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들, 딸 사이좋게 낳아 아주 잘살고 있다. 그리움에 그리움을 더하였더니 더 큰 사랑이 되었던 것일까? 서로 만나지 못하면서 지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일까? 날마다 나에겐 축복이요 행복이요 기쁨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도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아하가 2002년인가에 컴백을 했다. 이젠 20대의 날렵한 모습이 아닌 40대 중반의 중후한 모습과 예전의 파워풀한 음색은 사라졌지만 경륜의 음색을 가지고 아직도 나와 마누라를 설레게 하고 있다. 2002년 노벨상 시상식에서 헌팅 하이 앤 로우를 부르는 아하는 더 이상 어릴 적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 부부의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중에 환갑이 된 아하가 내한공연을 온다 하더라도 꼭 마누라 손을 붙잡고 가야겠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의 기억체이고 매개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