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이벤트

by 이야기여행자

남편은 손을 다친 덕분에 호텔에서 온전히 쉬게 되었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드디어 혼자 한라산 백록담을 갈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모든 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이 남자 앞에서는…

의학적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상처였지만 남편은 마치 손목을 잃은 전사처럼 웅얼거렸다.

“나는 손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내 옆에서 밀착 수발해 줘.”

남편은 뻔뻔한 얼굴로 말하고는, 심지어 두 손을 나한테 들어 보이며 반짝반짝 흔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전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아니겠지?’

“아들내미 팔 깁스 했을 때 알지? 나도 해줘. 부러웠어.”

‘이런… 젠장’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50살 넘은 사람이 지금 ‘기브스 시절 똥꼬 닦기 서비스’를 부러워하고 있다. 그것도 자기 아내에게.

나는 단호해야 했다.

아니, 단호해야만 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앞으로 남편이 뭘 가져오든 ‘나도 해줘’ 세트로 평생 묶여 살 것이다.

나는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여보… 당신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있잖아…”

나는 그러면서 남편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남편이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불안, 의심, 기대가 뒤섞인 표정.


“오늘 흑돼지 삼겹살 먹어야 하잖아? 안 그래?”

남편이 눈이 반짝하며 환하게 웃었다.

“먹어야지. 나 먹고 싶어!”

역시나 우리 집 남자들은 먹는 것 앞에서는 다들 뇌가 꺼진다. 나는 한눈으로 남편을 쉬지 않고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빨리 전략을 수정해야 하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 흑돼지집 가. 내가 고기도 굽고, 쌈도 다 싸줄게!”

“오예~” 남편이 두 팔을 흔들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남편이 흔들어대던 두 팔을 허공에 멈춘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조건이라니?”

잠시 뜸을 들였다. 남편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랐고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말했다.

7-1.png 남편과 흑돼지 구이와 혼자산행을 협상하는 아내

“나… 내일 한라산 혼자 올라가게 해 줘. 그리고 당신이 혼자 똥꼬 닦아.”

그리고 지체 없이 마지막 결정구를 던졌다.

“안 그러면 흑돼지는 못 먹어.”

나는 속으로 타이밍도 좋고, 어조도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 아니 우리 집 남자들은 먹는 것에는 진심이고 최우선이다.

3초가 채 지나기 전, 남편이 체념한 듯, 하지만 비장하게 말했다.

“알겠어. 대신 오늘은 삼겹살. 내일은 목살 먹을 거야! 그래도 되지?”

나는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러엄~ 먹고 싶은 것 다 먹어야지.”

그렇게 남편을 달래고, 나는 다음날 내 소원대로 오롯이 혼자서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 올랐다. 눈 덮인 백록담을 보니 그간의 고생을 모두 잊고, 올해는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았다.


‘이런 게 전화위복이구나!’

하산길에 나는 문득 은서가 어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잘… 지내고 있겠지?’

하지만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췄다. 어제 나에게 수많은 메시지를 보낸 후로 메시지나 전화가 없다는 건 나름 은서가 오빠를 상대로 잘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보낸 문자의 의미를 알았겠지?’

나는 혼자서 가벼운 마음으로 하산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엄마가 20년간 아빠 다루는 거 너도 봤잖아. 너라면 잘하고 있을 거야.’

호텔에 도착하니, 남편이 붕대 감은 손으로 자기 혼자 볼일 다 봤다며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것 마냥 자랑질을 해댔다.


“나 혼자 다 했어! 너무 어려웠지만… 나… 오늘 성장한 것 같아!”

엄청난 무용담이었다. 이럴 때는 우쭈쭈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역시 우리 남편이네. 내가 그래서 당신한테 반했지요!”

남편은 감동해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흑돼지! 또 먹으러 가자!”

신나서 총총거리며 달려가는 남편을 뒤에서 바라보며, 나는 은서를 생각했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결과를 알게 되겠지.

“은서야… 엄마는 너를 믿는다.”

그리고 그 시간,
집에서는
최종전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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