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구나."
노원의 어느 막창집에서 H가 나에게 말했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공유했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아빠에 대해 털어놓았다. 어쩌다 보니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현실을 고백했다.
"누구를 탓할 필요 없어. 자고 일어나면 펼쳐지는 건 결국 내 인생이야. 우리는 지금처럼 열심히 살면 돼."
아빠를 원망하는 나에게 H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살면서 더 많은 시련들이 닥칠 텐데, 내가 어려운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겨내 본 사람이라 좋다고 했다.
2018년 10월 13일이었다.
H와 헤어지고 오는 길에 그가 나에게 건넨 말들이 너무 감사해서 메모장에 적어뒀다.
그리고 3년 뒤 H는 나를 떠났다.
우리 가족은 흩어져 있다.
나는 아빠와 연락을 끊은 지 2년째고, 가족들로부터 독립을 해서 따로 살고 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어떤 때는 사람들의 행복한 가족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불편한 적도 있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거 같아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해지기도 했다. 혹여나 밝고 친절한 내 모습이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 같아 보일까 봐 무섭기도 했다.
연인이 생길 때면 내 가정사를 언제 어떻게 털어놔야 할지 두려웠다.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이, 행복한 순간에도 늘 불안함을 갖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가 가족인 것만 같아서 가족의 연락을 피한 적도 있다.
엄마의 전화를 세 통 정도 피하고 나면, 문득 죄송한 마음이 올라온다.
점심 메뉴로 갈비탕을 먹을 때면, 나에게 처음 갈비탕을 알려주시던 할아버지가 떠올라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온다.
동생들의 SNS 프로필 상태가 자주 바뀔 때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안부가 궁금해진다.
이게 사랑인 건가?
내가 마음껏 탓하는 건 괜찮아도 다른 사람이 욕을 하면 안 되는 존재, 나를 힘들게 해도 놓지 못하는 존재.
그게 사랑이고, 나에겐 그게 가족인가 보다.
가족 탓을 하며 사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됐던 것뿐이니까.
가족을 멀리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잠시 거리를 두고 있는 것뿐이니까.
아무리 탓하고 하소연해 봤자 내 삶이 달라질 건 없다.
탓해봤자 내 인생이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이 때로는 내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그래서 저 멀리 도망가려 하지만 결국엔 사랑이라 놓지 못한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인생이기에 무한한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보려 한다.
그러다 보면 어쩐지 답을 알 수 있는 기분이다.
지나고 보니 사랑이었던 것들, 절절하게 사랑했지만 결국 사랑이 아니었던 것들, 온전히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내가 노력해야 하는 것들.
정답을 안다고 한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될 일들은 그렇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