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일의 나
그러나 나는 무엇 때문에 다르델로가 거짓말을 했을까 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다르델로 역시 자기 자신에게 곧바로 이 질문을 던졌으나 답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짓말을 했다고 부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가 의아했던 것은 그 거짓말을 왜 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보통 누구를 속이거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생기지도 않은 암을 꾸며 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 거짓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웃음 역시 이해가 불가능했다. 그는 왜 웃었을까? 자기 행동이 우스웠던 것일까? 아니다. 유머 감각이 그의 강점도 아니었다. 그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상의 암이 그를 즐겁게 했다. 그는 길을 가며 계속 웃었다. 그는 웃었고, 좋은 기분을 만끽했다.(19-20p)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알랭(44p)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라몽(96p)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 라몽 (147p)
최근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으며 밀란 쿤데라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아니 아직 이해는 다 못했고,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읽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여기저기 인용하고 다른 작가들과 비교하고 심지어 세계적인 작가라 칭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3~4년 전의 내 수준으로는 그의 글이 하도 유명해서 읽기는 했지만, 내가 방금 읽은 책이 소설인건지 에세이인건지 평론인건지도 구분이 안 되었었고,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었고, 비슷한 의미를 이어 붙여 설명하는 긴 문장도 읽어 내기가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글을 읽는 동안 독자를 헷갈리게 하고 다 읽고 나서 한참 생각하게 하고 몇몇 문장들을 곱씹어 보게 하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안다. 그렇기에 이제야 나도 그의 가치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3년 전에 기록해 놓았던 문장들과 이번에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총 3 부분으로 분류를 할 수 있었다. 보라색은 그때도 지금도, 갈색은 그때만, 녹색은 지금만 와닿았던 문장들이다. 보라색이 10군데, 갈색이 9군데, 녹색이 2군데이다. 녹색에 비해 갈색이 더 많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무래도 처음 읽었을 때, 물론 다 이해를 못 했더라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더 많았다는 뜻이겠지?
지금은 두 번째 읽으면서 새롭게 눈에 들어온 부분을 곱씹어보고 싶다. 특히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 “예상치 못하게 다시 찾은 삶”이라는 부분. 나에게 왜 3년 전에는 무의미했던 이 부분이 유의미하게 다가왔는지.
최근 3년은 어찌 보면 내 인생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편안하고 여유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흔한 비유지만 나는 3년 동안 딱 ‘호수 위의 백조’였다. 수면 위로 드러난 상반신의 평온함에 비해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가는 다리는 쉼 없이 물길을 헤치는 삶.
백조의 상반신은 나의 외면, 가는 다리는 나의 내면. 혼자일 때면 아니면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상처받고 방황하고 포기하고 체념하고 원망하고 욕하고 쓰러지고 울고 불었지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좋아 보인다”, 심지어는 "편안해 보인다"고들 했다. 아 나의 연기력이란.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나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텼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과정이고, 사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면과 외면의 그 괴리감이 점점 더 커져 마치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끊어져버릴 고무줄처럼 아슬아슬하던 순간에 나에게도 “예상치 못하게 다시 찾은 삶”의 길이 생겼다. 바로 지금 여기, 내가 하고 있는 이것, 글쓰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난하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머리가 지끈거려도 글을 쓸 때만큼은 키보드를 두드릴 때만큼은 잡념이 사라진다는 것. 누구는 종교에 기대, 누구는 술에 기대, 누구는 게임에 기대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채우고 위로하겠지만 나는 글쓰기의 힘을 빌어 나를 들여다보고 깨우치고 쉼을 얻는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나에게 힘을 주는 글쓰기를 계속해나가려고 한다.